97 현장비평가가 뽑은 올해의 좋은 소설 출판사: 현대문학 지은이: 김만옥 회칼 내 집 초인종을 누르는 사람이 도둑이라 해도 문부터 열어주고 보는 게 내 고질이다. 나의 그런 고약한 버릇을 두고 그는 순진성을 가장한 화냥기라 했다. 허둥지둥 문을 열면 밖에 서 있는 사람이 오히려 과한 대접에 겸연쩍은 얼굴로 말하곤 한다. 하나님 소식 전해드리러 왔습니다. 이거 미안해서 어떡하나 싶다가도 집 안에서 현관 쪽에 귀기울이고 있을 그를 의식하고 짐짓 매정스럽게 말한다. 지금 너무 바빠서 들을 시간이 없는데요. 문을 닫고 돌아서면 그가 기다렸다는 듯 이죽거린다. 누구 기다리는 사람 있어? 왜 데리고 들어와서 가진 것 다 내주지 그래. 우리 집에 줄 게 뭐가 있어? 네 몸뚱이는 있잖아. 까치소리를 듣고 기대에 찬 기색일 때도 그는 참지 못한다. 까치는 원래 의심이 많은 새라 낯선 걸 보면 개처럼 짖는 것야. 반가운 손님은 뭐 얼어죽을 놈의 반가운 손님. 오히려 위험하니 경계를 늦추지 마 라 하는 뜻이라고. 내가 그렇게 기다린 것의 정체를 그가 알기나 했을까. 나를 비상시켜즐, 하다못해 저 심연으로 추락시켜줄 운명적인 이변이라 것을. 우리들 내부에 서는 도저히 기대할 수 없는 힘이란 것을. 얼굴 크기의 거울을 방바닥에 놓고 심연 같은 천장을 들여다보든지 바로 내려서기만 하면 내 몸을 얹어줄 것 같은 웅덩이 속의 하늘을 한없이 들여 다보든지 운동장 한가운데서 가랑이 사이에 머리를 처박고 거꾸로 하늘을 보든지. 그런 짓들을 좋아한 것은 거꾸로 보이는 천장이나 하늘이 실제보 다 더 깊고 더 무한하면서 갈 수 있는 곳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더 깊고 더 무한하고 더 신비한 세계로의 진입이 가능 할 것 같은 착각이 좋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몇살 때였던지, 햇볕이 따뜻한 봄날 어둑한 방안에서 거울속의 천장으로 내려가 보려다가 거울을 깨뜨린 적도 있었다. 거울 속에 비친 천장은 실제의 천장이 아니었다. 실제의 천장은 모서리 가 있고 방의 크기 이상 커질 수 없었지만 좁은 거울 속에 비친 천장은 넓 이와 깊이에 한계가 없었다. 상상할 수 있는 만큼 깊고 상상할 수 있는 만 큼 넓었으며 그 빛깔조차 실제의 천장과 같은 듯하면서 같지 않았다. 그것 은 또 다른 세계가 내 옆에 가까이 있음을 뜻했다. 아직 한번도 도둑이 든 적이 없어서 그럴까 그가 아무리 화냥기라 이죽 거렸어도 여전히 낯선 외판원, 수금원, 검침원, 전도꾼 누구에게나 얼결 에 반가워하며 문을 따주고는 이미 그가 내 곁에 없는데도 여전히 움찔 놀 라며 다음부터는 절대 그러지 말아야지, 문밖에 세워둔채 용건만 물어보고 돌려보내야지 다짐하곤 한다. 하물며 아직은 남편인대 그가 비록 나를 죽이기 위해서 왔다 하더라도 내 집을 찾아온 그에게 문을 따주지 않고 배기겠는가. 사실은 찾아온 사람이 남편인 줄 알고 문을 열어준 것은 아니었다. 그의 말마따마 화냥기 때문이었는지 그냥 습관적으로 문을 열었는데 그가 들어 왔던 것이다. 그이 집이 아니고 내 집이기 때문일까, 그는 그전처럼 물어보지도 않고 아무에게나 문을 열어주면 어떡하냐 나무라지 않고 들어왔다. 내가 저녁식 사를 막 끝냈을 때였다. 그가 말없이 현관문을 들어설 때 그의 손에는 꽤 무거워 보이는 짐이 들 려 있었다. 신문지로 아무렇게나 둘둘 말아서 연두빛 노끈으로 질끈 묶은 그 물건이 뭔지 알 수 없었는데도 섬뜩하고 불길한 기운이 스며나오는 것 같아 가슴이 쿵쾅거렸다. 그의 출현만으로도 가슴이 쿵쾅거릴 이유는 충분 했다. 그의 갑작스러운 출현을 예상하지 못한 게 이상스러웠다. 아마 머리가 느슨해져 예상 못 한 게 아니라 우정 예상 같은 걸 피한 거구나 하는 생각 도 들었다. 그를 보지 않고 산 요 몇 년 동안 잠자고 있더 악몽들이 한꺼번에 함성 을 지르고 일어나는 느낌이었다. 게다가 그동안 소설이랍시고 써서 발표한 내 글 여기저기에 그가 이건 내 이야기구나 할 만한 대목들이 얼마나 되었 을까 허둥지둥 더듬어보았으나 머릿속은 벌집을 쑤신 듯 왕왕거릴 뿐이었 다. 내 몸의 허둥거림을 통해 머릿속의 허둥거림이 투명한 유리 속처럼 들여 다보었을 것이다. 내 집인데도 갑자기 남의 집에 들어선 것처럼 어디에 서 있어야 할지 앉아야 할지, 손은 어떻게 간수해야 할지, 그에게 식사나 차 대접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그가 공격해오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허 둥대는 나를 아랑곳하지 않고 그는 아무 말없이 거실 바닥에 퍼지르고 앉 아 들고 온 물건의 포장을 풀어헤쳤다. 그가 풀어놓은 물건은 내 허둥거림의 근거 있음을 적시하고도 남는 것이 었다. 그것들을 보자 더 큰 공포의 후회가 철없는 허둥거림을 전압시킬 정 도였다. 내 집 문을 따준 데 대한 후회도 아니었고 세 살짜리 딸아이의 손을 잡 고 그의 집을 버리고 나온 다음에 죽은 듯이 숨어 있지 않고 세상에 대고 웨는 소설가가 된 걸 후회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예리한 통증은 살아 있 음에 대한 그원적인 후회, 바로 그것이었다. 마루 가득 쏟아져 나온 물건은 한 개의 숫돌과 몇자루의 회칼이었다. 그는 거실 바닥에 짐을 불어놓은 다음 일어나서 화장실을 찾아 들어가 죄변기 속에다 불길하게 일어서는 그의 성기를 연상시키는 쏴아 소리를 내 며 힘차게 소변을 보았다. 그 소리는 마루에 벌여놓은 화칼과 아주 잘 어 울렸다. 그는 마루로 나와 흩어져 있는 칼과 숫돌을 주섬주섬 모아 들고 다시 화 장실로 들어갔다. 그는 화장실 문을 활짝 열러놓고 마치 내게 칼 가는 시범을 보이듯 숫돌을 회칼을 슥슥 갈고 있다. 칼을 갈 장소가 없어서 내 집을 찾아 온 것처럼. 전에도 그는 몇자루씩 집 안에 둘 정도로 회칼에 대한 잡념이 강했다. 틈만 나면 정성껏 갈아서 유산물전시장처럼 죽 늘어놓곤 했다. 그가 집에 없을 때 감히 용기를 내어 감춰버리면 말없이 집 안을 뒤져 찾아내서 다시 늘어놓았다. 그 회칼에 대해서 아주 잊어버린 것은 아니었지만, 도저히 잊을 수 없는 일이긴 했지만 그가 재 집에까지 그걸 갖고 나타나는 일은 꿈에도 예상 못 했던 것이다. 회칼은 둬두더라도 바보같이 그의 단순한 출현까지도 예상 못하지 않았던가. 섣불리 말을 붙여서도 안 될 것 같고 계속 말을 하지 않고 버티기도 힘 이든다. 그래도 말을 안 하는 것보다 하는 쪽이 나을 것 같다. 언제 출감했느냐, 그렇게 오리 수감되어 있지는 않았을 텐데 나와 서 그 동안 어디 있었느냐, 시골 부모님 집에 있었느냐, 여러 가지 말거리를 엮 어봤으나 한마디도 말이 되어 나오지 않는다. 나는 어쩔 수 없이 그의 시선 밖으로 나가지는 못하고 엉거주춤 선채로 그가 들어오기 전에 보고 있던 텔레비전 화면에 눈을 주고 있다. 그러나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고 회칼 가는 소리만 슥슥 들릴 뿐이 다. 그는 밤새껏 칼을 갈 모양이다. 어쩌면 영원히 끝내지 않을 지 모른다. 차라리 욕을 퍼붓든지 그처럼 사정없이 폭해을 하든지 난폭한 방법으로 성욕을 채우는 편이 더 나을 것 같다. 칼이 몇자루인지 확실한 숫자는 모르겠으나 한두 자루가 아닌 것만은 확 실하다. 포장을 풀 때 얼른 보인 게 여섯 자루는 됨직했다. 나는 계속 텔레지전 호면에 눈을 주고 욕실 쪽으로는 돌아보지 않는다. 그는 슥슥 칼을 갈고 어느 정도 날이 섰는지 한참씩 손가락으로 훑어볼 것이다. 전에도 그랬으니까. 내 눈으로 보지는 않지만 환히 보인다. 숫돌에 칼을 갈고 날을 꼼꼼히 살 펴보고 갈고 또 갈고 다 갈아진 칼은 한쪽으로 밀어놓고 다음 칵을 슥슥 간다는 것을 아주 열김히 몰입해서. 어떤 절정의 경지로 다가가기 위하여. 마당 귀퉁이에서 농기구를 사이에 두고 머리를 맞대고 있던 부자가 갑지 기 후닥닥 쫓고 쫓기고 있다. 회광이 같이 햇볕에 낫날을 전들이며 늙은 아버지가 아들을 쫓아다닌다. 늙은 아버지도 젊은 아들 못지 않게 날렵하 다. 뒤란으로 감나무 밑으로 석류나무 밑으로 장독대 옆으로 헛간 모퉁이를 돌아 다시 앞마당으로 나와 신방을 신은 채 대청마루를 건넌 허리 굽혀 쪽 문을 넘어 다시 뒤란으로 나간다. 잡히면 죽는다 싶은지 아들이 죽기살기로 뛰고 아들을 쫓는 늙은 아버 니도 죽기살기로 뛴다. 번득이는 낫닐이 내가 이미 알고 있는 세상에 짝짝 금을 그어 피가 배어 나게 상처를 입힌다. 낫을 든 아비는 헐떡이는 기관차처럼 달리며 말을 토해낸다. 내 이놈을 오늘 기어이 잡아죽이고 말아야지. 얼마나 어앳동안 쫓고 쫓꼈을까. 쫓고 쫓김의 시작이 어땠는지 알 수 없었듯이 슬그머니 낫을 놓아버리는 끝맺음도 이해할 수 없었으나 낫을 추격으로부터 놓여난 아들이 극심한 공 포 후에 쏟아지는 눈믈을 걷잡지 못하고 부엌문 엎에 ㅂ어 서 있는 내게로 와서 이 병신 하며 세차게 따귀를 때리는 이유는 이해할 것 같았다. 상처받은 자존심과 무너진 위신으로 인한 분노 같은 것이라고. 형들과 누나들은 다 중학 때부터 도시에 보내 공부시키니까 저절로 위 학 교로 올라가서 결국 대학까지 졸업했는데 나는 가업을 이을 자식으로 지목 해넣고 시걸 종합고등학교만 졸업시킨 거야. 나도 형들이나 누나들과 같은 길을 밟았으면 너 같은 바보와 결혼은 안 했겠지만. 그의 어감에는 나와의 결혼을 후회하는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나를 지칭한 바보란 단어에는 결속감과 내 순정성을 존중해주는 동지애도 배어 있는 것 같았다. 과묵한 그가 마음속 깊이 품고 있던 어버지에 대한 불만을 그정도라도 내게 털어놓은 것도 낮에 또 다른 이해할 수 없는 사건 이 벌어졌던 날 밤이었다. 우리들의 결혼 후 처음으로 맞은 그의 아버지의 생신날, 서울에 사는 그 의 누나들, 형들의 내외까지 다 모인 거창한 점심식사 시간이었다. '87년 의 4월, 공교롭게도 호헌선언이 있은 직후이기도 했다. 그가 대학교수인 그의 큰형에게 물었다. 형님, 호헌선언이 뭐요? 그가 정색을 하고 말문을 열었을 때 식탁에 앉은 식구들의 표정이 갑자 기 굳어지는 것 같았다. 누나들이며 형님들이 하나같이 시한폭탄의 작동을 감지하고도 속수무책인 아슬아슬해하며 눈을 내리깔고 숟가락질만 하고 있 는 게 역력한데도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이야기를 계속했다. 헌법을 지킨다는 뜻인 모양인데, 우리 같은 시골 무식쟁이들이 얼핏 듣 기에는 비장감까지 느껴진단 말이에요. <호>자도 그렇고 <헌>자도 그렇고, 느낌이 그렇잖아요. 호국이란 말에서 느끼는 것처럼 내 목숨 걸고 지키겠 다는 눈물겨운 비장감이 느껴기더라고요. 그러니까 우매한 백성들에게는 그보다 더 그럴듯한 속임수가 없죠. 그 지키겠다는 헌법의 내용이야 어찌 되었건 우리 같은 사람들은 깨부수는 것보다는 지키는 것이 좋은 줄 안단 말이에요. 형님도 호헌 쪽이겠죠? 형님이야 우리처럼 무식해서 그런 건 아 니겠지만 비아냥이 가득한 동생의 눈에 붙잡힌 형님이 대답에 난처해할 겨를이 없 었다. 그런 분위기에 익숙하지 않은 나까지도 어쩐지 그의 입에서 나올 다 음 말이 <어용>일 것 같은 아슬아슬한 예감이 든 바로 그 순간, 그의 아버 지가 들고 있던 숟가락으로 맞은편에 앉아 있는 막내아들의 이마빡을 힘껏 내리치며 소리쳤기 때문이었다. 얼마나 세차게 내리쳤는지 막내아들의 이마빡에서 금세 피가 배어 나오 는데도 그의 아버지는 하고자 하던 말을 뱉어내었다. 네까짓 놈이 뭘 안다고 주둥아리질이야? 하라는 일은 안 하고. 아무리 좁은 시골바닥이라도 소문으로는 알 수 없었던, 그의 매력인, 몸 에 몸에 밴 냉소주의의 정체가 밑동부터 환하게 보이는 순간이었다. 식탁에 둘러앉은 사람들 중에 그 아무도, 심지어 그의 엄니조차 배어나 오는 피를 보고도 허둥거리지 않았다. 흔히 있는 일인 것처럼 식사를 계속 할 뿐이었다. 나 역시 왜 그랬을까. 약상자로 달려가 필요한 약품을 꺼내 와 그들이 보는 앞에서 따뜻한 위로의 말을 하며 닦아주고 발라줄 용기가 왜나지 않 았을까. 그에 대한 그들의 무시와 냉대를 부당하다고 생각하고 울분이 치 밀어오르는데도 그들의 야합의 기세에 눌려 손끝 하나 까딱할 수 없고 입 도 뻥긋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들과 다른 생각, 그들과 다른 행동을 감히 표현할 수 없어던 이유가 알 수 없었다. 엉거주춤 일어선 채 왈칵 눈물만 쏟아놓고 마는 내게 역정으로 가득 찬 시어머니의 질책이 날아왔을 뿐이었다. 무엇이 서러워서 우냐. 저 인산은 혼이 좀 나야 해 식구들이 모여서 기 분 좋아하는 걸 못 참는다니까. 무슨 수를 써서라도 깽판을 놓고 말지. 우리의 결혼은 나의 환상과 그의 냉소주의의 누면 결합이었을까. 그의 형들과 누나들이 남겨둔 헛간 옆방의 책더미 속에서 한쪽은 환상을 키우며 또 다른 한쪽은 냉소의 구덩이를 파며 보낸 사춘기의 결말이었다. 그가 과수원과 논농사와 방앗간 운영이란 가업의 계승자로 지목받은 것 은 진학할 사능성이 없기 때문에 내려진 결론일 수도 있었다. 그의 엄청난 독서는 진학과는 무관했고 오히려 진학을 방해했으니까.어쩌면 그 자신조 차 진학을 위한 노력이 싫어서 가업의 계승자로 지목되는 것을 묵인했는지 모른다. 결혼을 하고 몇차례 아버지와의 야만스러운 충돌 장면을 내게 목격당하 고 난 후, 그는 마치 선불맞은 짐승처럼 무차별적인 공격의 대상을 차츰 나로 바꾸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아버지에게로 향하던 저항 에너지를 나를 향한 공격 에너지로 전환시킨 것이다. 생각만 해도 끔찍한 그 일이 있었던 것은, 임신한 지 넉 달째 되는 몸으 로 그와 함께 수확한 과일을 서울에 내다팔고 돌아가는 길이었다.가을이 한창인 때였다. 결혼 전에는 독서 친구로 곧잘 나누던 두 사람 사이의 대화가 끊긴 지 오래되어 그때도 침묵 상태였다. 그는 운전하고 나는 팔짱 끼고 고치 속의 누에처럼 웅크리고 앉아서 전 조등이 비치는 세상만큼 보고 그만큼만 생각하고 있었다. 새벽을 앞둔 어 둠 때문에 단풍 구경을 못하는 게 아쉽다는 생각은 조금 했지만 영원히 그 상태가 지속되어도 괜찮을 것 같은 안도감조차 있었다. 옆에서 운전하는 사람이 바로 시한폭탄이란 것을 깜빡 잊고 시한폭탄이 장치되어 있는 시집 을 떠나 있는 상태가 너무도 편안했다. 어쩌면 잊어버린 게 아니라 그 시 한폭탄은 시집이란 공간에서만 한정적으로 폭발하는 폭발물이라 생각하고 있었느지 모른다. 그러나 그때 운전하는 남편의 의식 속에도 내 의식과 같은 게 흐르고 있 었던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원래 의식의 흐름이란 종잡을 수 없음과 느닷 없을 뜻하는 것일까. 허연 강물처럼 끝없이 이어질 듯싶던 비닐하우스의 행렬이 끝나자 길 양 쪽으로 낮은 숲이 나타났다. 그가 순발력 있게도 숲이 끝나기 직전에 길가 에 바짝 붙여 차를 세웠다. 소변이 마려운가보다 생각하는데 차에서 먼저 내려선 그가 내게 명령했 다. 내려. 왜? 나는 소변 안 마려운데. 혼자만 소변보고 올라와. 그는 버티고 서서 다시 소리쳤다. 내리라니까. 자동차조차 멈춰 더할 수 없이 고요해진 허공에 대고 외친 그의 목소리 는 깜짝 놀랄 정도로 우렁찼고 거역할 수 없는 힘이 있었다. 나는 마치 최면술사에게 홀린 것처럼 비비적기리며 트럭의 조수석에서 땅으로 내려섰다. 나중에 딴소리하지 말고 세운 김에 마렵지도 않아도 소변을 봐두라는 뜻 인 줄 알고 길 옆에 쭈그리고 앉으려는 나의 팔을 잡아 끌며 그가 말했다. 그게 아니야. 그는 나를 데리고 숲으로 들어갈 작정을 했던 것이다. 밤의 숲 속으로. 남편이 아내의 손을 잡고 밤의 숲으로 끌고 들어가는 것은 무엇을 뜻하 는 것일까. 방금 전 전조등 불빛 너머로 숲의 존재를 느끼자마자 나는 가을 숲 속에 서 채털리 부인의 정사를 흉내내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숲의 의미나 느낌과는 딴판이었다. 그게 밤의 숲이었음에랴. 지나가는 자동차도 없는 시간에 정적은 귀가 먹먹할 정도였고 동행하는 남편의 거친 숨소리는 낭만적이기는커녕 공포스러운 것이었다.먹이를 덮 치기 직전의 짐승의 숨소리 같았다 할까. 그를 뿌리치고 도망치고 싶었으나 마치 꿈속에서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 처럼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드디어 그가 나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예감과 같이 그건 낭만적인 정사 를 위한 공격이 아니었다. 일방적으로 치고 또 치는 말 그대로의 구타였 다. 그 시간 그 장소에서 왜 마누라 패기를 해야 하는지 일체의 설명 없 이. 고통도 고통이지만 공포 때문에 숨이 막혀왔다. 인적 없다는 것이, 불빛 이 없다는 것이, 무엇보다 구원을 들어줘야 할 남편이란 자가 바보 가해자 라는 것이 절망적으로 무서웠다. 이건 남편이 아니다. 절대로 남편일 수 없다. 남편은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그 자리에 어떤 다른 존재가 나타나서 구 타하는 것 같았다. 내가 정신을 잃은 것은 아픔 때문이 아니라 극심한 공포 때문이었다. 새벽의 병원 응급실, 어느쪽이 진짜인지 헷갈리게 하는 남편의 근심어린 시선 아래에서 나는 깨어났다. 그날 그 숲 속에서의 남편은 어디서 출몰했던 것이었을까. 그의 내부에 흐르던 어떤 의식이 어떤 난기류를 만나 그를 짐승으로 돌변시켰던 것일 까. 그날 그 심한 구타에도 뱃속의 아기는 무사했다. 그러나 나는 그 아기가 이 세상에 나와 말을 하고 생각한다는 표시가 보일 때까지 단 하루도 불안 에 떨지 않은 날이 없었다. 그 핏덩어리의 어느 작은 부위라도 손상된 건 아니까. 그런 충격 후에도 모든 세포는 제자리로 돌아갔을까. 과연 자연의 이치는 그런 충격을 이겨 내는 것일까 하고. 그는 슥슥 칼을 갈고 있다. 그 칼을 흡족하게 갈고 나면 나를 폭행할지도 모른다. 때리고 차고 쓰러 뜨리고 밟고 그리고 회칼로 얼굴을 그을지도 모른다. 그날처럼. 나는 도망쳐야지 생각하면서 그의 시선이 닿는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옮 기지 못한다. 벌떡 일어나서, 혹은 가만히, 눈치 안 채게 현관으로 나간다.현관문을 열기도 전에 덜미를 잡힌다. 아니, 현관 밖으로 무사히 나간다. 오백 미터 저쪽의 파출소 불빛을 향해 냅다 뛴다. 그가 갈고 있던 회칼 한 자루를 손 에 들고 나보다 더 빨리 뛰어온다, 낫을 들고 쫓아다니던 시아버지처럼. 그는 여전히 칼을 슥슥 갈고 있다. 한마디 말도 하지 않고. 아이에 대해 서조차 아무것도 물어보지 않는다. 밀린 일을 해야 한다는 핑계로 며칠 전부터 초등학교 입학을 앞둔 딸아 이를 가까이 사는 동생네에 맞기기를 참 잘했다고 생각하며 나는 계속 텔 레비전에 눈을 주고 있다. 텔레비전 화면 속에서, 아니 이 세상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내 머릿속으로 전달되고 있을 뿐이다. 그는 숲 속의 그 일 이후 더 이상 황폐해질 수 없다며 아버지에게 분가 를 요청하기 시작했다. 그는 그 자신이 가해자였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것 같았다. 마치 우리 두 사람이 복수의 피해자들이라 생각하는 것 같았다. 부모와 같이 시골집에서 살면 언제 또다시 그런 피해를 당할지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의 요구는 집요했다. 우리끼리 서울 가서 살겠어요. 분가시켜주세요. 네깟놈이 서울 가서 뭘 해먹고 살겠다고? 내 밑에서 시키는 일이나 하고 주는 밥이나 먹지. 나는 네깟놈에게 한푼도 대줄 수 없다. 분가를 요청하는 그 일이 또 다른 전쟁의 불씨가 될 것은 뻔한 일이었 다. 부자간에 몇마디 말이 오가나 하면 어느새 밥상이 뒤엎어지고 전화통 이 박살나고 낫을 들고 쫓고 쫓기는 일로 연결되었다. 그는 쫓고 쫓김의 마지막엔 마치 위화도에서 회군하는 장수처럼 내게로 말머리를 돌리는 것 이었다. 분가도 하기 전에 내가 지레 죽을 것 같았다. 폭행당하고 울고 있는 나를 보고 시어머니는 말하곤 했다. 뭐가 서러워서 우냐. 바보 같으니까 두들겨 맞지. 아기의 돌이 지나고 나서 드디어 그의 분가 요구가 관철되었다. 그의 아버지가 얻어준 집은 서울 변두리 주택가의 지하방 한 칸짜리였 다. 주인집의 번듯한 대문과 차고문 옆으로 낸 쪽문을 열고 들어가면 골목 같은 그 집 뒤란 깊숙이 들어앉은 장독대 밑에 화장실과 주방이 딸린 지하 방이 있었다. 습기 때문에 아기에게 해로울까 조금 걱정스럽기는 해도 그와 나는 둘 다 한동안 가슴이 벅찼다. 우리끼리의 삶. 시아버지의 전횡으로부터 탈출은 공포로부터의 자유와 같은 뜻이라 생각했다. 그게 공포로부터의 자유가 아니라 공포의 핵심으로 들어가는 일이 될 줄 은 그도 나도 물론 그때는 알지 못했다. 쥐도 새도 모르게 매맞기 좋은 방 이 될 줄이야. 나중에, 시부모는 제까짓 것들이 무슨 수로 서울 생활을 꾸려가겠느냐 곧 되돌아오겠지 생각하고 일부러 조건이 좋지 않은 싸구려 방을 구해준 것이라 말했다. 그는 시장이나 공장의 운전배달원으로 일했고 나는 그의 동의를 얻어 방 송대학에 입학했다. 꿈에 부푼 서울 생활의 시작은 그랬다. 출석 수업을 받아야 할 때는 마침 친정 여동생이 가까이 살아 동생이 아 기를 돌봐주곤 했다. 그 멋진 서울 생활의 꿈이 깨어지게 된 것은 그가 시골에서 그의 아버지 와 충돌을 일삼듯이 직장 윗사람이나 동료들이나 배달 나간 거래처 사람들 과 충돌을 일삼았기 때문이었다. 자연 한 직장에서 한 달 이상 붙어 있기가 힘들었다. 집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부모와 같이 살 때는 부모와의 충돌로 어느 정 도 완화된 후에 내게 가해지던 폭력이 전혀 마모되지 않은 채 생으로 행사 되었기 때문에 훨씬 그 강도가 높아졌고 빈도 또한 잦아졌다. 공포로부터 의 자유가 지옥 같은 공포로의 진입이 된 내막은 그랬다. 아버지의 큰형에 대한 편애에 반비례한 그에 대한 냉대와 무시가 원인이 던 열등감 증세가 친구도 없고 사회생활의 경험이 없는 그의 서울 생활에 서는 더욱 악화되기만 했다. 출석 수업이 있는 날이라 아이를 동생에게 맡기고 학교에 갔다 오는 내 게 재떨이를 냅다 던진 날도 그가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일찍 귀가한 날 이었다. 그는 내 방송대학 입학에 동의한 것을 까맣게 잊어버린 것 같았다. 어쩌 면 우정 잊어버린 척했는지 모른다. 이 시간이 되도록 어디서 무슨 개 같은 짓을 하다 온 거야? 씨팔년. 그 가 회칼을 구해와서 보라는 듯 화장실문을 활짝 열어놓고 칼을 갈기 시작 한 것도, 난폭한 섹스로 스트레스를 풀려는 듯 유난스런 관계를 요구하기 시작한 것도 열번째쯤 직장을 그만둔 때였다. 그날, 그가 나를 두들겨 깨울 때는 아 오늘은 무사히 하루가 지나갔구나 하는 안도감으로 어느새 깊이 빠져들었을 때였다. 아이도 옆에서 쌕쌕 자 고 있었다. 일어난 옷 같았다. 그는 그 즈음 전에는 안 하던 방법으로 난폭하고 이상하게 성교하는 버 릇이 생겨 있었기 때문에 자는 사람을 깨울 때는 또 그러려니 했는데 이상 하게도 벗어라 하지 않고 옷을 갈아입어라 했다. 잠에서 덜 깨어 뭘 잘못 들었나 하고 멍청히 앉아 있는 나를 그가 다시 다그쳤다. 빨리 옷 갈아입으라는데 뭘 우물거리고 있어? 산책 가자구. 그는 빙긋 웃기까지 했다. 지금 몇신데 산책을 가자는 거야? 몇시면 어때? 너 산책 좋아하잖아. 아무리 산책을 좋아해도 그렇지. 이 밤중에. 잔소리 말고 빨리 잠옷 벗고 다른 거 입으라니까. 달도 좋은데 이 구석 지하방에서 잠만 자는 건 억울하잖아. 달도 좋은데, 한 그의 강력한 각성제처럼 나의 잠을 깨웠고 푸른 달빛을 머금고 진중하게 퍼져 있는 들판을 못 견디게 생각나게 했다. 짜내면 푸른 물이 들 것처럼 풀잎 가닥가닥, 작은 들꽃의 꽃잎 하나하나에 스며 있을 달빛을 나도 받고 싶다는, 걷잡을 수 없는 욕망이 당장 갈 수 없다는 절망 감과 함께 나를 슬프게 했다. 나는 벌떡 일어나 바지와 티셔츠를 입고 점퍼를 걸치면서 시계를 보았 다. 새벽 한시였다. 고만고만한 주택들 담 밖으로 뻗어나온 라일락이 뿜어내는 은은한 향기 가 미세한 입자로 달빛 아래 주택가도 반분이나 풀릴 정도는 되어 마치 고 전음악을 들을 때처럼 내 기분이 달콤해져갈 때쯤이었다. 그가 집 근처 야 산으로 향한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야산이라니. 그 가을 숲에서의 악몽이 화들짝 되살아났다. 그가 내 마음의 변화를 알아챈 듯 앞서가던 발걸음을 늦춰 내 팔을 이끌 기 시작했다. 이제 그만 돌아가자. 단비 깨면 얼마나 놀라겠어? 깨긴 뭘 깨, 새벽까지 내처 자는 앤데. 그는 내 말을 못 들은 척 잡은 팔을 놓지 않고 내처 야산으로 올라갔다. 사람의 발길에 닳고닳아 낮에는 산이랄 것도 없이 속까지 되바라져 보이 던 그 야산이 깊은 밤에는 제법 웅숭깊었다. 듬성듬성한 소나무와 잡목을 목욕시키듯 달빛이 속속들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저기 공터까지만 갔다가 내려가자. 제법 쌀쌀하잖아. 의자에 좀 않았다가 가도 좋겠지만 추워서 안 되겠네. 우리가 지금 하는 건 예사스러운 산책일 뿐이고 어떤 기행으로 발전될 기미도 나는 전혀 예상 못한다는 걸 확인시키려고 할 수 있는 한 심상한 목소리를 내어 자꾸 지껄였다. 몇가지 간단한 체육시설이 있는 공터 앞에서 돌아서려는데 그가 나를 힘 껏 끌어당겨 돌려세우면서 소리쳤다. 안 돼. 뭐가 안 되는지는 몰라도 그의 격정적인 그 목소리는 내게 너무도 익숙 한 것이었다. 불길함을 채 감지하기도 전에 그가 내 옷을 낚아챘다. 눈 깜짝할 새였 다. 겉에 걸치고 있던 점퍼는 그의 손을 거쳐 맥없이 땅바닥으로 떨어졌고 티셔츠며 속옷은 불길한 소리를 내며 찢겨나갔다. 불안과 공포에 질려 반항의 말은 되어 나오지 않았지만 머릿속은 막 망 가지기 시작하는 기계처럼 최소한의 속도고 회전하고 있었다. 폭행의 방법이 전과는 달라졌다. 왜 이럴까. 잠들기 전에 본 뉴스 때문 일까. 그 사건을 흉내내는 걸까. 설마 그 뉴스 속의 범인들처럼 산 채로 매장하기야 할려고? 그는 아무 연장도 갖고 오지 않았잖아. 옷이 찍기고 땅바닥에 쓰러뜨려졌을 때 구타당하는 것보다 이편이 차라 리 나을지도 몰라 하며 포기하는 마음이었는데 그가 갑자기 작동을 멈춘 기계처럼 잠잠해졌다. 그가 제풀에 내게서 떨어져나가 무릎 사이에 머리를 파묻고 울고 있다는 것을 알자 나는 땅바닥에 굴려져 있는 점퍼를 찢겨진 속 옷 위에 걸치고 집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달려가면서 생각했다. 나는 풀잎이나 들꽃처럼 달빛을 받고 싶다고 했으면서 왜 무서워하며 도 망치는가. 폭풍을 견딜 수 없어서? 집 안에서 치르는 정사는 아무리 난폭 해도 견뎠지 않은가. 그는 옷을 찢고 쓰러뜨렸을 뿐 아무짓도 안 했는데. 아이가 걱정되어서? 그때 아이의 자지러지는 울름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울음소리는 점점 커지고 있었다. 한밤중에 잠이 깨었을 때 혼자인 것 깨달은 아이의 공포가 그대로 생생 하게 전달되는 울음소리였다. 집 앞에 도착했을 때야 쪽대문 열쇠를 그가 갖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 다. 다시 그에게로 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끔찍스러웠다. 극심한 공포 속에 서는 나오지 않던 눈물이 낭패감 앞에서 비로소 왈칵 쏟아졌다. 나는 쪽대문 앞에 털썩 퍼지르고 앉아 엉엉 울었다. 내 울음소리에 섞여 저 깊은 골목 속으로부터 빠져나오는 아이의 울음소리도 점점 커지고 있었 다. 마치 꿈속에서처럼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는 몸을 재촉하여 그가 있 는 야산에 도착했을 때도 그는 아까와 같은 자세로 앉아 있었다. 나는 몇발자국 떨어진 자리에서 그에게 울먹이며 소리쳤다. 빨리 열쇠 줘. 단비 운단 말야. 그가 최면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소스라쳐 일어나 나를 앞질러 비탈을 뛰 어내려 갔다. 내가 집에 도착했을 때 아이의 울음소리는 이미 그쳐 있었다. 어느새 도 로 재웠나 하는데 그가 외출에서 돌아온 아내에게 그동안 집 안에서 있었 던 일을 보고하는 것처럼 심상한 목소리로 말했다. 곤히 자고 있었어. 네 환청이었던 거야. 도대체 칼은 몇자루나 되는 것일까. 다 간 것을 되풀이해서 또 갈고 있 는 것일까. 저 칼 가는 소리만 그쳐도 살 것 같다. 그가 와서 칼을 갈기 시작하고 몇 달이, 몇 년이 지난 것 같다. 나는 그 의 칼 가는 소리 때문에 영원히 약속을 지키지 못할 것 같은 불길한 생각 에 휩싸인다. 그가 오기 전에 일을 끝냈어야 하는데 하며 후회도 한다. 원고를 넘겨줘야 할 약속일이 지났기 때문에 아이까지 동생에게 맡겨놓 고도 나는 단 한 줄의 글도 쓰지 못하고 있었다. 손톱도 깎고 목욕도 하고 빨래도 하고 그러고도 애ㄲ은 텔레비전만 학대하고 있을 때 그가 들어왔던 것이다. 그는 아주 가지 않을지 모른다. 그가 없는 몇 년간 내가 누렸던, 많은 환상과 많은 슬픔과 약간의 고독과 약간의 고통과 약간의 죄책감과 약간의 위선까지 버무려 당의를 입힌 내 아름다운 삶도, 그 아름다운 삶을 새기는 조탁사라는 칭송도 다 끝났는지 모른다. 그의 출현은 조악하고 추한 삶으 로부터 복귀를 뜻하는지 모른다. 그날 공포에 질려 울지도 않고 선 채 다리 사이로 오줌을 줄줄 흘리던 딸아이의 모습이 떠오른다. 회칼에 그어진 내 얼굴에서 흐르던 피, 우연히 들렀다가 그 장면을 목격한 동생의 비명, 그녀의 신고를 받고 달려온 경 찰, 연행되어가던 그의 모습도 떠오른다. 나는 한번도 그런 조악한 삶을 살아본 적이 없는 것처럼 위장하고 외면 하며 살아왔다. 그 지하방을 버리면서 이혼청구서를 내고 산과 하늘이 보이는 빌라이층 을 얻어 동화속같이 꾸며놓고 예쁜 식탁에 앉아 음악을 들으며 차 마시며 태어날 때부터 그렇게 살아온 것처럼 나 자신조차 착각하며 살아오지 않았 던가. 그가 구속되었다는 소식을 전했을 때만 해도 시집식구들은 그런 자식은 혼 좀 나봐야 한다면서 나를 동정하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내가 이혼을 요 구하고 위자료와 아이의 양육비와 재산 분할을 요구하자 재빨리 그의 명의 로 된 땅을 친척에게 명의이전해버리고 나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내가 이 집을 내 집이라 강조하는 것은 그런 연유에서다. 드디어 그가 일어나 허리를 펴는 기색이다. 움츠러들었던 허리의 근육이 우두둑 하고 펴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나는 칼 가는 소리를 더 이상 듣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과 칼로 그을지 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동시에 느끼며 본능적으로 얼굴을 가린다. 온몸의 근육이 우두둑 돌덩이처럼 굳어진다. 그가 한 자루의 긴 회칼을 선택해 들고 내게로 다가온다. 그가 나를 밀친다. 나는 비틀거리며 얼굴을 가렸던 손으로 옆의 의자 등받이를 짚으며 그 를 본다. 도대체 어떻게 된 노릇일까. 그는 한 자루의 회칼이 아니라 여러자루의 회칼을 한 아름 안고 장난기 어린 눈으로 나를 보며 창가로 간다. 창가의 울긋불긋한 이른 봄꽃 화분을 한쪽으로 치우고 그 자리에 회칼을 하나하나 정성들여 가지런히 늘어놓는다. 한 자루, 두 자루... 여섯 자루 다. 그가 손을 털고 의자에 와 앉아 나를 부른다. 차도 한잔 안 줘? 오랫동안 칼을 갈았더니 목이 마르네. 우유나 주스도 좋아. 냉장고에서 주스병을 꺼내 한잔을 따라놓는 나를 보고 그가 앉으라 한 다. 나는 그와 마주앉는다. 이런 시 알아? 청마 선생 시 말야. 칼 가시오 하는 시. 너희 정녕 칼을 갈라. 시퍼렇게 칼을 갈아 들고들 나서라. 그러나 여기 선이 사기하는 거리에선 칼은 깍두기를 써는 것밖에는 몰라 칼은 발톱을 깎는 것밖에는 감쪽같이 몰라 환도도 비수도 식칼처럼 값없이 버려져 녹슬거니 그 환도를 찾아 갈라 식칼마저 모조리 시퍼렇게 내다 갈라 그리하여 너희들 마침내 이같이 기갈들어 미치게 한 자를 찾아 가위눌려 뒤집히게 한 자를 찾아 손에 손에 그 시퍼런 날들을 들고 게사니같이 덤벼 남나의 어느 모가지든 닥치든 대로 컥컥 찔러 황홀히 뿜어나는 그 새빨간 선지피를 희광이 같이 희희대고 들이켜라는데 그리하여 그 목마른 기갈들을 축이려는데 가위눌린 허망들을 채우라는데 그러나 여기 도둑이 도둑맞은 저자에선 대낮에도 더듬는 무리들의 저자에선 이 구원의 복음은 도무지 팔리지가 않아 칼 가시오 칼 가시오 사나이는 헛되이 외치고만 간다. 천천히 시를 다 낭독한 그는 반쯤 감고 있던 눈을 번쩍 뜨고 주먹 쥔 손 을 식탁 위에다 맷돌질하듯 비비며 힘주어 말했다. 분노는 힘의 원천이야. 네 소설에는 분노가 빠져 있었어. 발표될 때마다 거의 다 구해 읽었는데 네 소설 속에는 슬픔과 아름다움과 착함과 부드러 움만 있어. 그런 것들로 안개를 피워 독자를 마비시키는 거야. 슬픈 사람, 아름답고 선하고 연약한 사람들이 유령처럼 흐느적거려. 그다지 슬퍼할 이 유도 없는데 슬프다고 우기고 아름다운 것 같지 않은데 아름답다고 우기면 종내는 승복당하고 말게 되더군. 너의 그런 소설을 읽고 있으면 너는 슬픔 조라는 생각이 들어. 슬픈 가락이란 뜻이 아니라 기쁨조의 반대를 말하는 거야. 어딘가 기쁨조라는 게 있다는 건 너도 알겠지? 그 기쁨조가 남자들 을 카타르시스시키고 그들의 고통을 마비시키듯 슬픔조인 너도 같은 역할 을 하는 것 같아. 사람들은 말하자면 독자들은 네 슬픔에 중독되어 옛날 내가 네 연애편지로 인해 그러햇듯 순화되고 비판력을 잃게 되나봐. 슬픔 조로서의 역할을 잘해내는 그 능력을 너의 힘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 하 지만 네 글을 읽는 독자들이 힘을 느끼지 못하고 마비되는 게 문제라고. 넌 글을 아름답게 슬프게 만들기 위해서는 자연현상조차 왜곡시키더군. 어 느 소설에선가 낙조를 본 바로 그 해변 그 방향에서 월출을 보았다고 하더 란 말야. 낙조라는 단어가 해지는 쪽의 하늘빛에 국한되지 않고 일반적인 저녁 어스름을 뜻한다면 모를까 독자인 나는 저무는 햇빛이 바다를 덮고 있는 중이라며 낙조를 묘사한 대목에서 반사적으로 서해의 해지는 정면을 떠올렸는데 얼마 후 바로 그 바다의 월출 장면이 나오더라구. 어? 좀 전에 그쪽으로 해가 졌는데 하는 생각이 들지 않겠어? 네 소설에서는. 실례되는 말이겠지만, 멋과 폼을 빼면 시체니까 소설의 멋을 위해 낙조와 월출을 한꺼번에 이야기하고 싶어 무리했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어. 에라 모르겠 다. 소설인데 뭐, 소설은 거짓말인데 뭐, 같은 해변에서 다 본 걸로 하자 그랬나보다고. 그런 걸 소설의 새 기법에 의한 거라 하면 우리 같은 사람 들은 할말이 없어지니까 입다물어야지. 내가 너무 빨리 그 바다를 일몰만 보이는 서해로 단정해버리고 읽어서 그런 거야? 그래도 그렇지. 이 사람 아. 유럽이나 다른 대륙. 아니 중국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지. 눈만 돌리면 산이 가려 있는 좁은 우리 나라에서, 같은 자리에서, 그것도 사방이 툭 트 인 산꼭대기도 아니고 해변에서 일몰과 월출이 다 보인다고 하면 되나? 어 쨌든 아무리 소설이 거짓말이라 해도 자연 현상까지 왜곡시키면 소설의 전 실성에 문제가 있게 되고 그걸 눈치챈 독자는 사기당하는 것 같아지지. 그러나 다행히, 아까도 말해듯이 네 글에, 네가 피운 안개에 마비된 독자 들의 눈에는 그 왜곡이 보이지 않는 모양이더라고 . 아무도 그런 지적을 하지 않고 찬사 일변도니. 마치 네 책 광고에 나오는 사진을 보면 네가 꽤 미인인 것처럼 보이는 것과 같지. 적당히 머리카락을 늘어뜨리고 반쯤 가 려진 옆 얼굴 사진을 보면 멋이 있고 분위기가 있거든. 세상에는 아름답고 슬프고 달콤하고 착하고 부드러운 것만 있는 게 아니라는 걸, 분노도 추함 도 악함도 오장육부가 찢어지는 고통도 있다는 걸 알았으면 좋겠어. 물론 네가 모를 리가 없지. 나 같은 놈과 산 세월이 고통스럽지 않고 통분스럽 지 않을 수 없었을 테니까. 알면서 외면하고 안개를 피운다는 걸 잘 알아. 이제 나 갈게. 저 칼들은 네게 주는 선물이야. 저 칼들을 보면서 분노를 키우라고. 글을 쓰고 싶은 욕구가 촉발될지 누가 알아. 칼날의 양면성이란 게 있잖아. 쓰는 데 따라 흉기도 되고 이기도 될 수 있다는. 네 기억 속에 남아 있는 흉기 개념을 빨리 지웠으면 좋겠어. 그럼 잘 있어. 단비는 이모 집에 갔겠지. 단비 만나러 또 올게. 그는 현관문을 나가다가 아 참 하고 돌아섰다. 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 아 그러면 그렇지, 그렇게 쉽게 가줄 리가 있나. 그가 돌변할 다음 모습을 지레 상사하며 몸을 움츠리는데 그런 나를 보고 빙긋 웃으며 그가 말했다. 나를 고맙게 생각해. 나 같은 인간과 살아보지 않았으면 글을 쓰고 싶은 욕망이 생기지 않았을지 모르니까. 나와 얽힌 과거조차 없었으면 네 인생 은 맹탕이고 글쓰기 욕구는 영원히 잠잤을 수도 있으니까. 정면으로 파고 들지 않고 비껴가며 안개를 피우는 것도 실은 그 과거에서 헤어나지 못한 다는 징표일 수도 있지. 이젠 나를 거꾸러뜨리고 정면으로 돌파하라고. 그는 그 말을 남기고 거짓말같이 깨끗이 떠나갔다. 그가 나간 문을 보며 이제 이혼이 어려워지는 쪽은 그가 아니라 내쪽이 겠구나 하는 예감이 들었다. 해설 : 정현기 사람들이 사는 모든 <집>에는 어둠과 빛이 공평하게 들어온다. 적어도 해가 드높이 떠서 세상을 비추고 있는 동안 <집>에는 아무리 어두운 집이 라 해도 빛이 든다. <땅의 집>에 비치는 태양의 빛과, 그림자로서의 어둠 은 공존한다. 그러나 이른바 <하늘의 집>이라 부를 <집>에서 한 가장이 그 가슴속에 거느린 어둠의 그림자가 짙으면 짙을수록 그것은 <식솔로서의 남>을 크게 억압하거나 죽음에 이를 폭력으로 작용한다. 김만옥의 <회칼>은 한<집안>내에서 편견과 탐욕을 정리하지 못한 가장이 얼마나 무서운 폭력으로 <집안 사람들>을 괴롭히는지를 섬뜩한 서술로 이 야기하여 보여주고 있다. 시골에 사는 한 <집>의 농부 아버지는 큰아들을 지극히 사랑한 반면 작은아이들에게는 냉대와 갖은 수모를 다 주며서 길렀 다. 공부를 잘한 큰아들은 마음껏 공부한 다음 서울로 출세해 나갔고 막내 인 작은아들은 공부가 하기 싫어 엉뚱한 독서와 <냉소>로 세상 읽는 반항 아가 되었다. 그러므로 당연히 작은아들은 시골에서 아버지와 함께 힘든 농사일에 종사한다. 아버지의 큰아들에 대한 편애와 작은아들에 대한 냉대 는 <집안>의 균형을 깨는 필연적인 관계 도구이다. 균형 깨어진 관계 구도 가 김만옥의 <회칼>이 담고 있는 가정 폭력의 시작이다. 미망과 어리석음 으로 가득 찬 아버지의 폭력은 자연스럽게 작은아들에게 이어져 매맞는 아 내<나>의 절망으로 된다. 이런 <조악한 삶>은 과연 현실생활 속에 다반사 일까? 폭력의 앞뒤를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일은 보질없는 짓이다. 늙은 아버지 가 낫을 들고 젊은 아들을 죽이겠다고 <죽기 살기로> 뛰는 것을 보고 나서 작중인물은 이렇게 표현한다. <번득이는 낫날이 내가 이미 알고 있는 세상 에 짝짝 금을 그어 피가 배어나게 상처를 입힌다.> 이것은 삶의 어둠 자체 이고 지옥 영혼들이 저지르는 질곡이다. 이런 질곡은 그의 아들이 짊어진 어둠이며 그의 아내인 주인공이 져야할 또 하나의 잠아다. 섬뜩한 관계맺 음이다. 그런데 <집안>의 어둠으로 가득채운 이 작품의 끝이 독특한 여운 을 남기고 있어 흥미롭다. 회칼 여섯자루를 말없이 가는 긴장으로 주인공 과 독자를 사로잡은 이 작품의 어둠은 오히려 작품 쓸 소재로서의 분노하 는 힘이 되어왔음을 폭력주체는 강변하고 있다. 폭력의 당사자 남편의 입 을 통해 가해지는 <소설 쓰기 힘>내용은 궤변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것 이 현실임은 부정할 수가 없다. <착한 것>의 존재를 가능케 하기 위한(?) <악한 것>의 강렬한 조명을 우리는 이 작품 <회칼>을 통해 인상적으로 읽 는다. 신풍근 배커리 약사 지은이 : 김소진 끈적해 보이는 아스팔트에서 올라오는 복사 열풍이 보도 블록 위에서 있 는 사람들의 얼굴로 밀려왔다. 가로수는 잎이 제법 무성한 플라타너스였지 만 그늘은 기껏 네댓 사람이 들어설 만했다. 그 안에 늦더위 때문에 기운 이 빠진 사람 예닐곱 명이 옹기종기 쪼그리고 앉아 빨간 고딕체 글씨로 동 산종점이라고 새긴 마을버스 표지판을 힐끔힐끔 쳐다보고 있었다. 콘크리 트를 개어넣어 배가 불록해진 육면체의 녹슨 쇼트닝 통에 해바라기처럼 박 힌 둥근 표지판 아래쪽에는 <나는 오늘 헤어센스에 간다>는 미용실의 광고 문구가 있었지만 새로 생긴 타수육 전문 채인점 광고 스티커에 가려 <헤 어>자는 아예 보이질 않았다. 조금이라도 그늘을 밟고 가려던 사람들이 가로수 밑에 죽치고 앉아 발치 에 툭툭 차이는 이들을 피해가느라 한번씩 양미간을 찡그렸다. 재덕은 가로수 오른편으로 네댓 발짝 떨어져 서서는 버릇처럼 몇번이나 긴 모자챙을 지그시 다져 눌렀다. 표지판 바로 앞에는 주름치마를 입은 중 년여인이 물방울 무늬가 어룽진 양산으로 햇빛을 가리고 두 발끝을 가지런 히 모은 채 곧 도착할 마을버스의 첫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휴, 우리 애기 땀띠 좀 봐." 젖살이 한창 도톰하게 오른 걸로 봐 첫돌바기쯤 된 듯한 아이를 가슴팍 에 안은 젊은 엄마가 아이의 목덜미를 손등으로 연신 훔쳐 종아리가 껑충 드러난 면바지의 재봉선에 닦으며 중얼거린다. "빌어먹을 차는 왜 이리 안 온디여, 그저 확... " 가로수 그늘 아래에 남방의 윗단추 두 개를 풀어헤친 채 앉은 사내가 신 경질이 잔뜩 묻어난 억양으로 투덜거렸다. "방금 뒤꽁무니 내빼고 떠나버리는 걸 같이 봤으면서두 그래쌓네... " 잠에 빠져 고개가 자꾸 처지는 아이의 턱을 어깨 위로 추스른 ㅈ은 여자 가 사내에게 곱지 않은 눈길을 전지며 대꾸했다. 사내는 턱을 밑으로 잡 아당겨 눈을 치뜨고 가래를 돋워 뱉은 다음 앉은 다리를 빼 구두 바닥으로 썩썩 비볐다. 남자는 광대뼈가 불거진 마른 체격이었지만 여자 쪽은 어깨 가 딱 바라진 데다 살푸둥이가 좋았다. 두 사람의 억양과 얼굴이 재덕에게 낯설지 않았다. 재덕은 자신과 언뜻 마주친 사내의 눈길이 목덜미께를 칙 칙하게 감아도는 느낌을 받았다. 그렇지, 공작이발소에서 한번 밥사발을 엎어 쓴 듯이 촌스럽게 깎은 적이 있었지... 공작이발소는 재덕의 할아버 지 빵집에서 한길 따라서 겨우 네댓 아래쪽이었다. "근대 잔돈이 호주머니에 달랑 호주머니에 달랑 오백 원밖에 없어. 팥빙 고라도 하나사면서 구멍가게서 잔돈 거스를까봐." "더운데 괜한 안달일랑 하덜 말어. 운전하는 신씨하고 박씨하고 우리 집 에서 싸비스로 면도 싹 하고 간게 며칠 돼부렀다고 그깟 차비 갖고 실갱이 겠어? 안그래? 잠자코 나한테 맡겨둬." "그래두... " 다소곳해진 여자가 아이의 머리를 반대편 어깨로 옮겨놓으며 땀에 형클 어진 머리키락을 가다듬어주었다. 재덕은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현경 과 약속한 시각에서 칠팔 분이 지났다. 시내에서 볼일이 있다고 했으니 아 무래도 지하철을 타고 오기 십상일 터였다. 그는 학보사 기자인 현경과 만 나 따로 사는 자신의 할아버지를 찾아가려는 길이었다. 할아버지 저 재덕이예요. 옹냐... 건강하시죠? 요즘 자주 찾아뵙지도 못 하구... 진지는 잘 드시죠? 아암, 그깟 밥이야 아직까진 어금니도 성하겠 다 싱건짠지(김치) 한 쪽이면 선 자리에서 맨밥 한 그릇 뚝딱 말아먹. 지 금 뭐 하세요? 뭐 하긴? 하루벌이 꿰맞추고 있어. 잔돈 센다구. 저 내일 한번 찾아뵐려구요. 아무때나 오면 되지 전화는 무에... 저번에 말씀드린 거 있잖아요... 현경이 전화를 통해 방학 전부터 기획했다고 밝힌 시리즈의 이름은 <민 초에게 듣는 이야기>였다. 평범하면서도 거친 삶을 꿋꿋이 살아온 어른들 한테 녹음기를 들이대고 살아온 내력에 대한 이야기를 구술받은 다음 맞춤 법만 조금 손봐서 싣겠다는 거였다. 요즘 우리 학보가 너무 팍팍한 것 같아서 말이야. 또 정보를 주는 것도 좋지만 부담 없는 읽을 거리들이 받쳐줘야 되지. 말이야 좋지만... 쉽지 않을 텐데. 처음부터 쉬운 게 어딨어? 이제 한 학기밖에 남지 않은 이 학 보사 생활인데 앞으로 후배들한테 원고 청탁이니 취재니 편집이니 할 것 없이 훌훌 털어서 다 맡기고 난 이거 하나, 민초에게 듣는 이야기를 위해 서 녹음기 꿰차고 발바닥이 닳도록 돌아다녀 볼 심산이야. 내 자신한테도 공부가 될 테지 뭐. 울 할아버지한텐 별로 들을 얘기가 없을걸. 빵집을 오 래 하신 분이라니깐 그것 나름대로 얽힌 얘기들이 아마 모르긴 해도 한 소 쿠리는 나올걸. 난 벌써 감이 오는데. 빵집은 무슨 빵집... 그저 길거리에 서 찐빵이나 삶으시며... 그러니까 더욱 이번 시리즈에 알맞지 안 그래? 사업에 성공한 사람의 자수성가한 이야기 같은 거라면 굳이 우리가 맡을 필요도 없잖아? 암튼... 취재가 성사되면 알겠지만 울 할아버진 완전 우익 이야, 우익. 그정도는 알아두라고! 웬 우익? 지금 좌익 우익 따지게 됐니? 기층 민중들이 온몸으로 겪어온 우리의 삶을 그저 담담하게 이야기로 풀어 보겠다는 거 아냐? 그걸 이해 못해? 나는 모른다. 말씀은 한번 드려볼게 네가 알아서 해. 할아버지에 대한 취재 요청을 받았을 때 은근히 재덕의 마음에 걸린 이 가 바로 할아버지 곁에 새로 생긴 여인이었다. 노인대학에서 만나 이 년 가까이 같이 살던 푸르뎅뎅한 잠자리테 안경 할머니와는 지난해 가을 살림 을 깬 모양이었다. 지난 봄 홀몸으로 겨울을 난 할아버지한테 기별을 받고 다녀온 작은어머니는 그 여인이 슬하에 한 점 혈육 없이 일찌감치 혼자가 된 한산 이씨인데 재봉틀 일을 꽤 오래 한 사람이라고 귀뜸해주었다. 작은 어머니는 그 여인이 생각보다 곱고 조쌀하게 늙어 저번처럼 막돌아먹은 치 는 아닌 것 같아 맘이 놓인다면서도, 한 가지 마뜩찮은 점은 종교생활을 하는 듯한데 약간 사이비 냄새를 풍기는 종말론파 같다는 것이었다. 그 연세에 젊은 할머니를 또 얻는 걸 보면 아버님 근력도 절륜하시기도 해. 한데, 종말론이면 이단 광신도 집단이 아닐까 재덕아? 한꺼번에 집단 자살하고 그런 거 말이야. 에아 아무렴 다 그럴까요 뭐. 그래두 왠지... 원래 기독교 교리엔 알고 보면 다 종말론적 요소가 은근히 들어 있다구요. 최후의 심판의 날에 예수가 세상에 다시 온다는 믿음도 새로운 게 아니라 이미 다 성경에 나와 있어요. 다만 그날을 아무도 모른다 했는데도 어떤 이들은 몇월 며칠 몇시다 하고 바람잡고서는 호들갑을 떠는 게 사기일 뿐 이죠 뭐. 재덕은 곧바로 할아버지 빵집으로 그 여인을 찾아을 때 선뜻 입이 떨어 지질 않아 신풍근 씨를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어깨부터 내려오는 앞치마를 두르고 있던 할아버지는 재덕의 눈빛을 알아챘을 터이지만 표정 없는 얼굴 로 육자배기 같은 잡가를 흥얼흥얼거리다가 빵솥의 뚜껑을 심벌즈 연주자 처럼 율동감있게 훌쩍 열어젖혔다. 그 바람에 할아버지의 모습이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김 속으로 파묻혔다. 보다시피 대접할 게 빵밖에 없어서요... 아유, 말씀 낮추세요 새할머니. 그러시면 제가 어려워져요. 그리고 제가 빵집 손자인데요 뭘. 어릴 적부터 별명이 빵보였어요... 나이는 갓 환갑을 넘겼지만 갸름한 얼굴에 살갗은 몹시 쪼글쪼글해 살아 온 나날이 신산했음을 짐작케 해주었다. 재봉일에 시력을 많이 빼앗겨서 그런지 두툼한 은테 돋보기를 쓰고 있었다. 이런 일 하시기 힘드시죠? 아, 아니예요 힘든 거는 할아버지가 다 알아 서 해주시니깐 나는 그저 빵접시나 나르고 물이나 떠다주고... 그런데 돋 보기를 껴서 가끔씩 김이 서리면 사방을 분간 못하고 당달봉사처럼 더듬어 서 그게 탈이지. 요구르트 아줌마가 준 물잔도 벌써 몇개나 깨서 할아버지 한테 여간 걱정하시는 말씀을 듣는 게 아니라구 호호. 사춘기 소녀처럼 일부러 입을 가리고 웃는 모습이 재미있어서 재덕은 자 신도 모르게 웃음을 한입 베물었었다. 재덕은 할아버지와 단둘이 앉았을 때 슬쩍 떠보았다. 할아버진 왜 교회 안 나가세요? 으응, 내각 왜 이 나이에? 새할머니 따 라서요. 으응 쩝쩝... 나도 처음엔 좀 껄쩍지근했지. 사람은 좋은데 말이 야, 세상의 끝장을 보겠다는 믿음이 도대체 뭔 소린가 싶어서 말이야. 지 금은 동감을 좀 하는 편이지, 어떻게요? 사람도 마가지지만 이 세상도 천 년 만년을 이대로 흥청망청 가겠니? 어림 반푼 어치도 없어. 그런 기고만 장한 생각을 깨치지 못하기 때문에 사람들의 마음이 시건방지고 턱없는 욕 심의 구렁텅이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는 주장에도 일리는 있어. 안 그렇니 재덕이 넌? 그건 인정하지만요... 인정하믄 됐어. 나도 그 이상은 모르 지... 아니 알 필요도 없지. 사람 심지 굳고 경우 바르고 해서 의지할 만 하면 늘그막에게서 더 이상 그만 아니겠어? 그런 게지... 옛날 어른들이 자주 말씀하시는 것에 용화세상이라는 게 있었다구 아암. 그 세상엔 그런 게 없어. 병고나 굶주림, 마음이 괴로운 심사 같은 거 말이야. 그렇다고들 하셨지. 그런데 그런 세상이 오려면 합번쯤은 하늘과 땅이 딱 달라붙는 생 난리가 한판 벌어진다는 거야. 말하자면 종말론이라는 것도 갈래는 다르지 만 결국 갸륵하게 보자면 그렇게 볼 구석이 없잖아 아암. 할아버진 아는 것도 많으셔. 누군가 다가와 뒤통수에다 가벼운 꿀밤을 먹였다. 물 빠진 청바지 속에 다 바둑무니 남방을 잡아 넣은 현경이었다. "야 이거 지금 대체 몇시야?" "그래도 맞춰오느라고 왔다. 아는 애한테 들러 이 녹음기 좀 빌려오느라 고. 이것 좀 받아줘." 재덕은 현경의 손지에 꼭지가 마른 금메달 수박통 끈을 건네받았다. "뭘 이런 걸." "끝물이라 그런지 값이 만만찮아서 큰 걸로 못 골랐어." 현경은 중의 바랑모양 어깨에 두루뭉실하게 늘어진 헝겊 가방 속에서 녹 음기를 꺼내는 새늉을 했다. "나중에 보고 빨리 줄이나 서! 늦게 타면 자리 없어." 마을버스가 도착하자 어디서 달려왔는지 어느새 출입문 앞에는 열댓 명 의 사람들이 북적댔다. 둘은 스펀지가 미어져나온 구석빼디 자리에 간신히 앉은 수 있었다. "신씨 수고 많아잉!" "그려 나 이제 막 교대했어. 어질 한 가족이 휘돌고 와!" "요기 한마음예식장에 잔치 보러. 돌산방앗간집 둘째아들 말이여." "아 그 얼굴이 살짝 얽어버린... 근데 오늘 같은 평일날? 술도 한 잔 안 걸친 모양이네." "평일이니깐 내가 잔칫집에 와부렀지 뭐. 토요일이나 공일 같은 날 이발 쟁이가 대목 봐야지 나다니면 뭐 먹고 살게. 그리고 술? 말도 말어. 입두 대지 못혔당게. 지금 들어가면 나도 엄청 바뻐나. 물역가게 홍씨랑 저, 거 시기 수도 박씨도 면도래야 쓰겄다며 오후엔 자리 지키라고 다짐을 받아갔 으니깐." "그려 가 앉아. 출발!" 마을버스는 곤님을 두 번 더 태우자 금세 콩나물 시루가 되었다. 제일 뒷자리에 자리잡았던 재덕은 머리가 반쯤 센 아주머니가 굽은 허리로 사람 틈새 파고 다가오자 일어나 자리를 양보했다. 구석빼기레 앉은 현경이 머 리가 천장에 닿아 고개가 꺾인 재덕을 올려다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뭘 웃어?" "그냥, 힘들겠다." "곧 내리는데 뭐." 몇자리 건너 옆에 앉은 중학생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새우깡을 씹었 다. "새우깡이다... 그치?" 현경이 손바닥으로 입을 가리고 하품을 하다 말고 물었다. 재덕은 짐짓 못 들은 척했지만 현경이 다시 옷자락을 툭 잡아당기자 "너나 달래서 많이 먹어"하며 불퉁스럽게 내질렀다. 현경한테 보냈던 시가 떠올라 새삼 쑥스 러웠다. 지난달 한총련이 주최한 8,15 통일축전 기간 중 벌어진 연세대사 태에 휩쓸린 재덕은 이학년 남학생이 주축이 된 사수대로 나섰다.그때 과 학관 안에 갇혀 있건 그는 경찰이 기습적으로 독수리작전을 펼치며 건물 안으로 밀고 들어오던 날 새멱 누군가의 ID를 빌려 어렵사리 컴퓨터 통신 으로 현경에게 편지를 eMLNJt다. 제목은 <그 사람을 가졌는가>였다. 그 사람을 가졌는가 만리길 나서는 길/처자를 내맡기며 맘놓고 갈 만한 사람/그 사람을 가졌 는가/온 세상 다 나를 벼려 마음이 괴로울 때에도/저 맘이야 하고 믿어지 는/그 사람을 가졌는가/탔던 배 써지는 시간, 구명대 서로 사양하며/너만 은 제발 살아다오 할/그 사람을 가졌는가/물의의 사형장에서/다 죽어도 너 희 세상 빛을 위해 저만은 살려두거라 일러줄/그 사람을 가졌는가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저 하나 있으니 하며 빙긋이 웃 고/눈을 감을 그 사람을 가졌는가/온 세상을 찬성보다도/아니 하고 가만히 머리 흔들/그 한 얼굴 생각에/알뜰한 유혹을 물리치게 되는/그 사람을 가 졌는가 찜통 같은 상황실에서 28명분으로 쪼갠 몽쉘통통을 입에서 녹이며 찾아 낸 시를 H에게(PS:무엇보다 시원한 생맥주 한잔에 새우깡 하나만 있어도 살 것 같다). 현경은 경찰의 독수리작전이 펼쳐지던 날 아침 학보사 편집국 사무실에 서 컴퓨터를 열었다가 화면을 가득 채우며 떠오른 시구 때문에 시큰한 콧 등을 손끝으로 꾹꾹 눌렀다. 재덕은 경창설에서 조사를 받고 단순 가담자로 분류돼 풀려난 지 일 주 일 뒤쯤 학교 뒤의 텅 빈 노천 극장 안에서 정민이라는 가명을 쓰는 운동 선배를 만났다. 그도 연세대 안에 있었지만 용케도 마지막 날에 사수대 주 력과 함께 진압 포위망을 뚫고 탈출에 성공했다. 청바지에 헐렁한 줄무늬 티셔츠를 입은 그는 노천극장 뒤 솔숲 주위를 멀찌감치서 돌다가 아무도 따라붙는 이사 없음을 확인하고는 방아깨비의 뒷다리를 쥐고 장난을 치고 있는 재덕 앞에 모습을 나타냈다. 그는 수배 중이었다. 고생했다! 그는 재덕의 등을 일부러 힘차게 두드려주었다. 재덕은 웃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방아깨비가 디딜방아처럼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했다. 수배생활은 어때요? 좀 마른 것 같아요. 마르긴? 잘 목고 잘 자고 있다. 어차피 해야 할 것 아주 즐겁게 하려고 하지. 짱박혀 있다고 해서 고립감 에 빠지거나 나태해지지 않으려고 운동도 규칙적으로 하고. 애들 좀 만나 보니? 재덕은 고개를 저었다. 탄압을 받고 나온 지 얼마 안 돼서 힘들겠지만 지금은 조직 재정비의 중 요한 시기인 것은 잘 알고 있겠지? 이럴 때일수록 힘차고 낙관적으로 사업 을 추진하는 게 바로 운동가의 올바른 품성이잖아. 내가 언제 운동가에 속 했었나요 뭐? 무슨 소리야? 우리 학교에서 연세대에 도대체 몇 명이나 들 어갔어? 채 맥 명이 안 되잖아. 물론 이걸로 절대적 잣대를 삼을 순 없지 만 그 중에서 특히 이삼학년들은 중심적으로 운동가라고 봐야지. 형, 우리 에겐 왜 그게 없죠? 뭔데? 위에서부터의 내부 반성이나 비판 같은 것 말예 요. 내부 반성? 아니 우리가 지금 반성을 할 때라는 거야 넌? 재덕은 정민의 눈이 휘둥그래지는 걸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왜 그래 생각하지? 넌 이번 싸움에서 우리가 진 거라고 생각하는구나. 이것이 시련임에는 틀림없지만 우리의 난관은 일시적일 뿐이지 않을까. 정 권의 하수인인 언론의 이성을 잃은 광한적 보도 때문에 한 때 국민 여론이 썰렁했던 건 사실이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통일과 애국의 순수한 열정을 가 졌던 학우들의 진실이 국민들의 공감을 사고 있다고 봐. 우리 한총련은 도 덕적으로도 완벽한 승리를 거뒀다두. 다음 번 대선만을 염두에 둔 이 정권 은 이번 사태를 통해 비민주적이고 비인도적인 행위를 자초함으로써 스스 로 문민이라는 문패를 떼고 그 파쇼적 본질을 여지없이 폭로당했어. 생각 해보자. 우리의 피에 물든 근현대사가 어땠는지를. 마치 어둠이 짙을수록 새벽이 가까이 다가오는 것처럼 탄압이 심할수록 우리의 통일 운동의 승리 는 확정적 아니겠니? 재덕은 쌉싸래한 잔디 이파리를 하나 뜯어 이빨 사이에 넣고 깨물었다. 숭고한 제단을 생각해봐. 피비린내를 풍기지 않는 제단이란 없는 거야. 그것도 아주 순결한 이들의 피를 말이야. 좀더 단련될 필요가 있어, 우린. 동지애나 확고한 세계관이 술집의 흥청거림이나 탁상공론에서 얻어질 수 있다는 낭만적 생각은 버려야 해. 그건 말이지, 이번 싸움처럼 적들의 혹 독한 탄압 속에서 굳어지는 거 아니겠니? 검은머리까치가 물수제비를 뜨는 돌처럼 톡톡 튀며 솔숲으로 들어갔다. 재덕은 손에 들고 있는 방아깨비를 풀숲 멀리 던졌다. 형! 지금 제단이라고 했어요? ... ! 경찰이 들어오던 마지막 날 새벽 과학관 옥상 담벼락에 둘이서 바짝 붙 어서 했던 대화 생각나요? 대충 나지... 그때 형하고 내가 얼마나 위험했 는지 알아? 너뿐 아니라 거기 있던 사람들이 다들 지치고 위험한 순간을 맞이하고 있었잖아. 그것말고... 내가 얼마나 과격했었어? 각종 화학물질 이 쌓여 있다는 실습실을 털어서 진짜 무장을 하자고 주장하고 지도부에 울부짖으며 건의했던 것도 나야. 그걸 받아들이지 않은 건 지도부의 현명 한 결정이었어. 백 번 지당하지 형. 그날 옥상에 서서 어슴푸레하게 다가 오는 새벽을 바라보면서 솔직히 얘기하자면 난 죽음을 생각했던 거야. 탈 수증에 시달리는 사람 같지 않게 왠지 몸이 가벼웠어요. 아마 형도 내 눈 빛에서 그걸 읽었을 거야, 틀림없이. 왜냐고요? 몰라요... 절망 때문이 아 니었을까? 내가 살고 있는 이 땅은 정말 나라가 아니라 마녀 사냥이 판치 는 어느 중세 암흑기의 한 군거 집단이라는 생각이 들었으니까요. 그 체재 가 자본주의든 사회주의든 아니면 파쇼주의든 간에 내가 어느 한 국가가 발급해준 주민증을 가진 인간이라는 게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거든요. 순식간에 오 천 명이 넘는 젊은이들을 토끼몰이로 몰아넣고 법적 용어도 아니고 감정적 용어인 빨갱이라는 이름으로 몰아치는 것까지는 좋다 쳐요. 이에 대해 아무도 논리정연하게 옹호하거나 또는 비판하는 사람들도 세력 도 없어요. 그토록 버글대던 거리와 광장이 이렇게 순식간에 조용히 텅 비 어 유령처럼 사라질 수 있을까? 그래서 이 땅의 젊은이들을 강요하는 집단 이나 사회는 이미 국가라고 할 수 없었어요, 결코. 그렇다면 누군가 죽음 으로써 항의해야 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 찼어요. 잠깐 눈을 질끈 감 으면 돼... 그렇게 생각했었죠. 그런 자기 파괴적 행동은 운동에 별로 도움이 되질 않지. 열사는 양산할 는지 모르지만. 그래요. 형이 그랬잖아요. 근데 평소 그렇게 엄격하건 형이 갑자기 나한 테 뭐라고 물었는지 알아요? 푸훗. 나보고 프렌치 키스를 해봤냐고 하면서 세상에 키스의 종류가 얼마나 될 것 같냐고 물었어요. 기억나죠? 그랬지. 그리고 나서 형이 운동에 가담하기 전에 무수히 만났던 여자들과 나눴던 키스의 종류와 감도에 대해 적나라하게 풀어놨잖아요. 나는 뭔소린가 싶었 지만 하도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는 바람에 형 얼굴만 어안이벙벙해져서 쳐다보고... 또 가장 맛좋아 하는 게 뭐냐고도 물었었죠? 그때 나는 문득 할아버지가 순수 빚은 찐빵이 생각나면서 굳었던 얼굴 근육이 좍 풀리는 걸 느꼈어요. 메말랐던 입 안에 침이 흥건히 고이면서. 여기서 나가게 되 면 우선 할아버지의 찐빵을 새삼 맛보아야겠다는 강한 식욕이 목구멍에서 갈고리처럼 솟구쳤어요. 그러고 나자 나는 형이 진짜 좋은 운동가라는 생 각이 들었어요. 형은 내가 절망적 몸짓을 감행하고픈 충동에 시달리는 걸 간파하고는 내게 삶과 연결된 끈을 슬며시 손에 쥐어준 거라구요. ... 글 때 생각 같아서는 풀려나자마자 당장 할아버지한테 오고 싶었지만 전 화 안부만 여쭈고 미적거리던 터에 마침 현경에게서 취제 제의가 들어왔 다. 높다란 철책을 두른 안쪽에 위장용 얼룩무늬 칠을 한 콘크리트 물 탱크 밑 한길이 바로 종점 차부였다. 방금 오르막길을 헐떡이며 기어오른 낡은 마을버스가 차머리를 반대쪽으로 돌려놓느라 앞으로 밀고 뒤로 빼고 하며 일그러진 배기통으로 시커먼 매연을 토해냈다. 현경은 얼른 손으로 입을 가리며 고개를 돌렸다. 오른쪽으로 깎아지른 돌산이 병풍처럼 막아서 있었 다. 그 절벽 아래 원래는 아파트 세채가 들어서 있었다. 왼쪽으로는 폐타 이어가 줄줄이 쌓여 있는 초등학교 담벼락을 에둘러 후문 쪽으로 구불구불 길이 뻗어 있었고 뒤쪽으로는 반대편 산동네로 가파르게 넘어가는 좁은 골 목길 어귀가 보였다. "어디야? 참 할아버지 존함이 어떻게 되신다고 했지? 신... " "간판을 보면 저절로 알게 돼. 거기 써 있느니깐. 저 차 앞머리가 들이 받을 듯 가까이 가려서 간판이 보이지 않지만. 바로 저기라니까." "안 봬." 재덕이 턱짓으로 공중전화 부스 쪽을 가리켰다. 마을버스 지붕 위로 낡 은 이층 창문이 보였다. 차가 비켜가자 옛날 복덕방 간판처럼 흰 바탕에 빨간 페인트로 굵직하게 휘갈겨 쓴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신풍근 배커리> "신, 풍, 근... ?" 재덕이 고개를 끄덕였다. 현경은 저도 모르게 터지는 웃음을 손으로 막 았다. 간판 밑 문 옆에는 불에 달군 쇠꼬챙이로 <자율방범대 자문위원> <청소년선도위 위촉위원>이라고 쓴 얇은 나무 현판이 매달려 있었다. "왜 웃어? 찐빵 만두집에 베이커리라는 간판을 다니깐 어이가 없냐?" "아냐, 아냐. 오핸 하지 마. 베이커리면 베이커리지 배커리야 뭐야? 그 리고 그 밑에 쓴 것 좀 봐. since 1951이라고 써 있는 거 보여?" "그건 나중에 내가 덧붙인 거야." "네가?" "응, 사실이거든. 어언 사십오 년의 유구한 전통이지." "사실?" "그래. 저기 또 나와 계시는구나." 재덕이 입을 굳게 다무는 시늉을 하더니 발걸음을 재게 놓았다. 현경은 얼른 웃음기를 거두고 긴장된 눈길로 앞을 바라보았다. 손갓을 이마에 붙 이느라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거기 한 장의 흑백사진이 펼쳐져 있었다. 신풍근 배커리 간판 위의 이층집은 아귀가 잘 맞지 않는지 반쯤 열린 채 간당거리는 낡은 여닫이 창문 때문에 앞으로 비스듬히 기울어진 느낌을 주 었다. 지붕에는 시골 방앗간에서나 볼 수 있는 벌건 녹물이 슨 양철 조각 을 얹어놓았다. 일층의 빵집은 대낮인데도 우묵해서인지 안이 잘 들여다보 이지 않았다. 오른쪽으로도 드럼통을 삼분의 이쯤 잘라 만든 화로통이 두 개 놓여 있었다. 한쪽에는 넓적한 솥이 있고 그 옆 화로통에는 만두를 찌 는 동그란 찜통이 켜켜이 쌓여 씩씩거리며 증기기관처럼 뜨거운 김을 뿜어 냈다. 제각기 모양세가 다른 문짝의 유리창에는 철 지난 입춘장처럼 귀퉁 이가 닳거나 찢어진 종이짝 찐빵 만두 분식이라고 쓴 글귀가 붙어 있었다. 문가 왼쪽에 터진 속을 청테이프로 막아놓고 소파에 앉아 희끄무레한 콧수 염 사이로 파이프를 물고 있는 한 늙은이가 앉아 있었다. 한눈에 신풍근 씨가 틀림없이 보였다. 머리에는 허연 광목천을 뱃사람처럼 둘둘 말아 썼 고 어깨에 걸치는 긴 앞치마에다 하얀 고무신을 신고 허공을 멍하니 바라 보는 늙은이의 시선은 전신주에 실타래처럼 얽힌 전깃줄에 걸려 있었다. "할부지!" 재덕의 목소리에 한 줄기 어리광이 배어났다. 담배 연기가 눈 속으로 들 어가 아린 듯 눈가에 주름살을 지으며 신풍근 씨가 고개를 돌렸다. "저, 저... 뛰긴 뭘 다 와서 뛰어." 텁텁하면서도 웅숭깊게 울리는 목소리였다. 그는 머리에 둘렀던 두건을 벗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두 팔을 벌렸다. "안 바쁘세요?" "지금 찌고 있으니까 바쁜 건 얼추 다 막았지. 기다리는 것도 일이야." "손님은요... ?" "짬 기둘려야지. 아직 속이 출출한 때가 아니잖남. 근디 같이 델고 온 샥신 누고?" 현경은 두 손을 앞으로 가지런히 모아쥐며 자기가 먼저 소개를 하고 나 섰다. "할아버지 안녕하세요. 전 재덕이 친구구요. 이름은 이현경이라고 합니 다. 대학 신문사 기자인데요 이번에 할아버님이 살아오신 얘기 좀 취재하 려고 이렇게 찾아뵀습니다." "아, 옛날 얘기 듣겠다고 한 그 처녀인 모양이구먼. 그런 걸 뭐 시간을 내서 들을 건덕지가 있다구설랑 중뿔나게스리... 다 늙은이들 객쩍고 실없 는 소리 줴치는 걸일 텐데." "제가 원래 어려서부터 어르신네들 옛날 얘기를 무척 좋아해서요." "그런 말 있잖남?" "뭐여?" "이바구를 밝히면 가난하다는 말 있지. 재덕아 저기 안에서 의자 있는 거 가져다 좀 앉지 그래? 일루, 일루 더운데 그늘 안으로 더 붙어. 아 보 소 임자! 여기 재덕이하고 샥시 한 사람 왔다니깐 그러네! 션한 냉수 사발 부터 내오구려." "아이구 할아버진, 샥시가 뭐예요? 싫어해요." "얜 참, 괜찮다는데도 그러네." 현경이가 재덕이를 옆눈으로 가볍게 흘겼다. "어서들 와요. 영감님이 말씀하신 그 학생인가 봐." 한산댁이 얼음을 띄운 물잔을 큰 쟁반에 받쳐갖고 나오다가 밀가루가 잔 뜩 묻은 손을 색동 앞치마에 썩썩 문질렀다. "예 안년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손님 대접이 이래서 어쩌나 호호." "이거 아이들이 사온 수박인 모양인데 반을 쩍 쪼개서 얼른 냉장고 안에 재워두구려. 식는 대로 그 화채 솜씨 좀 발휘하든지." "솜씬 무슨 솜씨라구... 근데 이따가 온다고들 했어요?" "대성 애들 말이지... ?" "예 철공소요." "준비는 허시구랴. 빵들 좋아하니 한 쟁반 두리기로 내다주면 시커먼 볼 따구니가 미어져라 욱여넣겠군. 어제는 짜장면을 엎어말이로 먹었으니 오 늘은 우리 집으로 빵먹으로 오겠지." "집 안으로 드시지 그래요?" "저희가 바쁜데 눈치도 없이 괜히 폐를..." 한산댁이 손사래를 쳤다. "그런 게 아니고. 내가 우리 교우 한 사람 불렀으니깐 가게 걱정은 마시 고 말씀들 느긋하게 나누세요 응." "그래, 폐는 무슨 폐... 말하자면 서로 품앗이지. 늙은이들 입에서 구린 내를 가시게 하는 데는 그저 지껄이는 게 최곤데 그럴 자리가 생각보다 많지가 않아. 늙은이가 할말을 내뱉지 못하고 자꾸 꿀떡꿀떡 삼키다보면 명이 짧아지는 법이야 아암." "어서들 이층 마당으로 오르세요. 평상 펴놨어요. 거기가 여기보담 조용 하고 시원하지." 한산댁이 안쪽으로 얼굴을 거두어갔다. "참, 방금 전에 두리기라고 하신 게 무슨 뜻이에요?" "으응, 여러 사람한테 한 상 푸짐하게 잘 차려주는 거. 갸네들은 한 두 개로 성에 차지 않으니깐 큰 쟁반에 층층이 올려 내뇌야지 아암. 한 사람 에 천오백 원만 내면 더 안 받아. 그대신 남기면 천오백 원만큼 벌금이 있 지. 벌금 내지 않으려고 나중엔 미주알에 힘을 주며 기쓰고 먹는 걸 보면 가관이지. 그 나쎄엔 또 그렇게 욱여넣지 않으면 쇠를 다루는 남정네들이 옹글게 힘을 쓰겠나. 자 날 따라들 오게나." 현경과 재덕은 뒷짐을 진 신풍근 씨 뒤를 쫓아 빵집 문턱을 넘었다. 신 풍근 씨가 왼 다리를 잘름잘름 절자 눈이 커진 현경이 재덕을 쳐다보았다. 재덕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회칠을 한 벽에 건 달력 위에 고정된 낡 은 선풍기가 덜덜덜 돌아가며 다닥다닥 붙은 여덟 개의 탁자 위로 미지근 한 바람을 일으켰다. 밀가루 포대가 켜켜리 쌓인 옆으로 가파른 시멘트 층 계가 보였다. 그 층계를 오르자 울퉁불퉁한 바위벽에 가로막힌 이층 마당 이 나왔다. 처마를 떠받치는 두 쇠기둥 사이로 비닐 장판을 깐 평상이 꼭 끼여 있었고 한쪽에는 펌프대가 서 있었다. "앞이 바윗덩이로 꽉 막혀 답답할 것 같지만서두 저 우묵한 돌 틈새에서 여름엔 시원하고 겨울엔 훈훈한 바람이 솔솔 일지. 한번 가까이 가서 얼굴 을 들이대보라고." 현경은 평상 위에 가방을 부려놓은 다음 푸른 이끼가 두툼하게 덮인 바 위 틈새로 조심조심 얼굴을 들이밀었다. "정말 찬바람이 나와요 할아버지!" "이 집이 돌덩이 위에 얹혀 있는 형국이기는 해도 수맥이 아래로 흐르고 있지. 저 뽐뿌를 봐도 알잖겠니? 수십 길 아래라고 하는데 빠이쁘를 참 용 이하게도 박았어. 가뭄에는 이 뽐뿌가 그래도 아직까지 한몫 단단히 해. 산동네는 상수도 수압이 달리거든." 현경이가 가방에서 녹음기를 꺼내 무릎 위에 얹어놓자 신풍근 씨가 물끄 러미 내려다보았다. "참 야그를 채취... 그게 아니고 아, 그래 취재하려고 왔다고 혔지? 그 럼 무슨 얘기부터 주절대야 할까. 살아온 게 다들 그렇고 그렇지 뭐." 현경이가 수첩을 쥔 손을 들어 간판 쪽을 가리켰다. "저기 천구백오십일년이요. 그게 재밌는 거 같아서요 헤헤." "그건 니가 한번 설명해보지. 쓴 사림이 직접 해야 어울리지." 신풍근 씨는 재덕을 턱짓으로 가리키며 빈 파이프를 입에서 빼 손으로 감싸안았다. 죄우 고갯짓으로 목덜미 근육을 풀고 난 그는 앞치마 옆으로 손을 넣어 호주머니에서 담뱃가루통을 꺼내들었다. 그가 궐련 담배 대신 파이프를 물기 시작한 지는 불과 삼 년 상관이었다. 재덕이 고등학교 이학 년 때 설악산으로 수학여행을 갔다가 비선대 아래까지 따라온 행상에게 사 서 선물을 한 것이다. 신풍근 씨는 집게손가락에 침을 퉤퉤 뱉는 시늉을 하고 비빈 다음 담뱃가루를 꺼내 파이프에 재고 엄지손가락을 곧추세워 꾹 꾹 눌러 담았다. 그러고는 뚜껑이 달아난 통성냥갑에서 성냥을 꺼내 불을 댕겼다. 양 볼에 어린아이 주먹만한 자리가 패이도록 힘을 줘 파이프의 물 부리를 빨아들이느라 관자놀이께 힘줄이 미어질 듯 불끈 도드라졌고 애벌 레처럼 말린 입술 새에서는 쭉쭉 생쥐소리가 났다. 무릎을 모은 세 사람 얼굴이 모두 한입 가득 뿜어져 나온 담배 연기에 휩싸였다. "그건 증거가 확실하잖아요 할아버지. 사진도 있구요." 현경이의 하얗고 기다란 목 한가운데 박인 점을 흘끗 쳐다본 재덕이 입 을 열었다. "사진?" "예, 그 귀퉁이가 닳아서 너덜너덜한 거 말예요." "알지. 피란 때 항도 부산에 있던 미군 부대 앞에서 털벙거지 뒤쓰고 찍 은 거? 꼬챙이로 풀빵 굽는 거 말이지?" "예 그거요. 거기서부터만 따져도 어언 사십오 년 아니예요? 반세기에 가깝잖아요, 이 빵집이." "풀빵?" 현경이가 수첩에 뭔가를 끼적거리려다 말고 웃음을 참는 듯한 표정으로 신풍근 씨와 재덕을 번갈아 쳐다봤다. 신풍근 씨는 정색을 하며 고개를 끄 덕였다. "딴은 그런 셈이지. 그게 그래 봬도 그땐 대단한 장사였어. 다들 먹을 게 궁하던 시절이었으니까. 드럼통에다 빵틀을 앉히고 톱밥이나 나무 부스 러기들 있잖아, 지저깨비라고 말이야. 그런 것하고 임시 막사 뜯다 남은 허접쓰레기 따위 같은 거 들입다 쑤셔 때설랑 풀빵을 구우면 사람들이 회 가 동해서 말이야 점심참이 되면 손마다 지전을 꼬나쥐고 일렬로 나래비 (줄)를 주욱들 서서 개구리참외처럼 퍼러죽죽한 고개들을 옆으로 내빼고 있는 모양이 참 볼 만했었어. 아암. 천세가 났지, 천세가 났어." "할아버님 죄송한데요 잠깐만요. 저... 천세라고 하셨죠? 그게 좀... " "천세? 물건이 없어서 못 판단 이 말이지." "야 너는 명색이 국문과에다 학보사 기자면서 그런 말귀 하나 못 알아듣 냐?" "그러는 넌?" "나? 나야 할아버지가 맨날 쓰는 말인데 귀에 벌써 못이 박이도록 익었 지 뭘 그래." 신풍근 씨는 현경고 재덕이 아랫입술을 비죽 내밀고 서로에게 지청구를 주는 모습을 바라보며 물부리를 깊숙이 빨았다. 그의 양볼이 또 다시 움푹 꺼져들어갔다. "그 사진들 죄다 아직 액자에 담아 걸러놨지... " 그는 아랫입술을 옆으로 돌려 담배 연기를 귀밑 뺨 쪽으로 뿜어댔다. "이따가 구경할 수 있나요?" "기럼. 그게 최초의 우리 가족 사진이었지." "뭘 그런 것까지 들여다보려고 해?" 재덕이 타박을 지르고 나섰다. "할아버지가 흔쾌히 승낙하셨잖아. 나 기자가 취재하는 옆에서 그렇게 온갖 참예를 하려 들 생각이라면 미안하지만 자리 좀 비켜줬으면 좋겠어." "알았어, 알어. 그렇게 도끼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어서야 이거 원 참." 현경이 외로 꼬고 있던 고개를 신풍근 씨 쪽으로 돌리며 엉덩이를 들썩 여 한 무릎 바짝 들여앉았다. 신풍근 씨가 두 팔을 활짝 벌리며 두 사람을 다독거렸다. "기왕 꺼낸 얘긴데 남세스러울 게 뭐 있어? 안 그렇니 재덕아?" "아유, 제가 뭐 남세스러워서 그런가요?" "그래 그렇지. 거기 보믄 니 돌아간 애비서껀 다 박여 있지. 한겨울에 눈포래(눈보라)가 콧잔등을 쌩쌩 에이며 콧물을 쥐어짜던 때니 따끈따끈한 빵틀에 죄다 솜바지들이 놀놀해지도록 바짝 다가앉아서... 촬영기사가 대 구 웃느라고 하는 통에 언 뺨을 씰룩거리느라 상들을 고약하게 찡그리고 찍었지 나 참. 그때 재덕이 네 아비가 네 살바기였구 둘째 상구가 미군 부 대서 나온 군용담요 포대기에 싸여 있어서 가만있자, 돌은 지나 젖은 뗐던 가? 아무튼 지금 보면 거지 중에 상거지였지만 그렇게 빵틀 주위에 매달려 설랑 전쟁통을 벗어났다구. 그게 바로 육이오 나던 이듬해니깐 벌써 일천 구백오십일년 일이야." "저두 어렸을 적에 입천장이 데지 않은 날이 없을 정도로 국화빵 많이 먹어봤어요. 그리고 지금도 겨울에는 붕어빵 무지무지하게 좋아해요 할아 버지." "아무렴 옛날엔 그게 오롯한 끼니 대용이었다구. 마침 미군 부대에서 사 카린이 봉지째 쏟아져 나와서 앙꼬 만드는 데 별로 힘이 들지 않았구. 나 중엔 빵틀이 네댓 개나 되어서 말이야 네 애비였던 상엽이도 그 고사리 같 은 손으로 빵틀을 돌렸을 정도니 알아보지 않겠니?" "밀가루는요... ?" "거저 맘만 먹으면 얼마든지 구할 수 있었지. 배급도 나오고 야미(암거 래를 뜻하는 일본말)로 빼오는 것도 있고... 암튼 미군 애덜은 줄지 않는 화수분처럼 없는 게 없었어. 대국은 대국이지. 자고로 먹을 빵이 풍부하면 나라의 기틀이 절로 서고 그게 바로 체제고 사상이고 질서를 낳는 거 아니 겠니? 빵을 많이 만들어낼 수 있는 쪽은 옳게 마련이야. 다들 거기가 좋다 고 떠드는걸? 이 할애빈 그래서 미국을 좋아하게 됐어. 하긴, 개네들이 보 내준 밀가루로 만든 빵을 먹은 입에서 게네들을 욕하기는 어려울 게야. 그 런데 요즘 젊은 애덜은 이상해. 겉 다르고 속 다르니 말이야. 미국 애들 말 애써 배우고 옷도 따라가고 입맛도 따라가면서 또 어쩔 땐 욕을 하거 든. 이상한 세태야 아암" "그래도 힘드셨겠어요 할아버지." "힘? 딴 게 아니고... 여름에는 풀빵이 잘 안 팔리니깐 내가 주근주근 피엑스에서 흘러나온 럭키 스트라이크에다 거시기 카멜 따위 양담배하고 입천장에 딱 달라붙는 허쉬 쪼꼬레 암질러 또 시레이숑이라고 미군 애덜이 먹던 군용 비상식량이 있어요. 그걸 받아다가 깔고 앉은 사과 상자 속에 감추고 장사를 했지. 그렇지 않으면 처자식 데리고 먹고 산다는 일이 까마 득했으니까 아암. 그러다 보니 그런 사람들한테 각다귀처럼 붙어서 피땀을 빨아먹는 양아치 애덜이 있어요. 주먹깨나 쓴다는 건달들일 텐데 그런 애 덜하고 붙으려면 무조건 깡다구가 일등이지 아암. 만주 봉천인가 어딘가서 부터 피양(평양)파나 뭐 사리원파다 신의주파다 해서 패거리들이 여간하지 않은데 게다가 항도 토박이들까지 나서서 설치는데 정말 죽을 맛이라구. 이쪽에서 아침에 손을 벌리고는 점심때 또 저쪽에서 옆구리를 찌르러 온 다 이 말이야. 그럼 우린 뭘 먹고 살아? 땅 파먹는다는 지렁이도 아니고 거렁뱅이 쪽박새도 아니고? 그렇잖음?" "아 예... " 현경이가 녹음기에 달린 마이크를 귀에 꽂아 제대로 작동되고 있는지를 점검했다. 손톱을 만지작거리고 있던 재덕이 깍지 낀 손을 뒤통수로 넘겨 손가락 마디에서 우두두둑 소리를 내며 말했다. "양철 지붕이 달아오르니깐 후끈거리네요." "조금 있다가 물땅끄 옆에 보면 아주까리 조르륵 심은 텃밭 있잖아. 그 리고 나가자꾸나. 거름 냄새가 좀 나긴 해도 이젠 그늘이 꽤 깊어졌을 게 야. 든든한 평상도 하나 있지. 아무튼 사진에 나오는 내 젊은 시절 허우대 를 구경하믄 절로 알겠지만 그땐 나도 이거 한방은 다들 괜찮았다고 했다 구 허허. 기렇지 아암. 나 겉은 상이군인이 믿을 게 뭐겠어? 나는 그거 하 나뿐이었지. 애들도 우리들 성질을 아니깐 어지간해선 건드리지 않았어." "울 할아버진 육이오 얘기만 나오면 끝도 시작도 없으셔 항상. 해병대 출신이시거든. 인천 상륙작전 때 왼 무릎 파편이 박혀서 제대하셨대." "상륙작전 때 그따위 눈먼 포탄에 당할 내가 아니고 말이지. 그 뒤에 말 이야 서울로 선봉으로 진격하면서 마포 쪽에서 최후 저항선을 펴고 격렬하 게 저항하는 괴뢰군 잔당과 맞붙은 거야. 그놈아들 깡그리 소탕하느라 밤 중에 대검 자루 하나 입네 물로 눈만 물 위로 내놓은 채 한강 도하작전을 펴다가 그렇게 된 거지. 그런데 나한테 그런 얘기 듣자고 온 거 아니야? 임자 그게 뭐야?" 한산댁이 붉은 플라스틱 바가지에 물을 가득 채워 갖고 올라왔다. "더우니까 물 좀 퍼올리려구요. 발이라도 담그고 있으면 좋지 않아요?" "시원한 화채나 어서 치지." "가만 계세요. 지금 얼음 새로 얼리거 있어요." 한산댁이 바가지를 기울이며 푸걱푸걱 펌프질을 하자 재덕이 얼른 대신 맡고 나섰다. "제가 할게요." 재덕이 펌프 손잡이를 몇번 더 움직이자 곧 꼭지로 물줄기가 터져 나왔 다. "한여름에도 이 물로 멱을 감으면 이가 다 덜덜 떨려서 우리는 엄두도 못 내. 할아버지나 냉수마찰로 건강을 유지하는 덴 좋지만. 가만 얼굴에 땀 좀 봐. 내가 아예 등멱을 쳐줄테니 바닥에 손 짚어봐 얼른." "에이, 됐어요 할머니." "왜? 내가 뭐 젊은 외간여자라도 되나 뭘." "그게 아니구요. 할머닌 괜찮은데 저기 숙녀라도 보고 있는데... " "에잉, 여름날 우물가에 나앉은 숙녀라면 그만한 건 감수해야지 뭘. 아 유, 엎드려, 엎드려. 누가 본다고 그래 응?" 재덕은 하는 수 없다는 듯 윗도리를 훌렁 벗고는 팔을 몇번 휘두른 다음 펌프 꼭지 밑에 손바닥을 펴고 엎드렸다. "우선 애벌로 물칠을 한 다음... " "흐학흐학... 애푸, 이거 완전 얼음물이네요. 살려줘요 어푸어푸." "호호 이렇게 씻고 나면 땀이 십 리 밖으로 쑥 달아날 거야 응." 한산댁의 손이 재덕의 등을 한 차례 철썩 소리나게 때리는 걸로 즉석 등 멱이 끝나자 현경과 신풍근 씨는 마주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근데 할아버지 제가 하나 여줘볼 게 있어요." "뭘?" "왜 밀가루 포대에 보면 강력 밀가루인가, 중력분인가 하는 글귀가 있잖 아요. 밀가루는 불면 다 날아가는 건데 뭐가 강력하고 중력한 건지 모르겠 더라구요." "아, 그거. 들어봐... 옛날에 밀껌이라고 있었어. 요즘처럼 껌이 흔하지 않던 시절에 밀을 훑어서 오랫동안 씹으면 희뿌연 회색빛이 도는 찰기 있 는 게 씹히거든. 그게 그런대로 질겅질겅 씹을 만하거든. 설탕이 너무 많 아서 단물 빠지고 나면 맛두 없고 이빨만 썩는 요즘 껌에 비해도 삐으면 씹을수록 구수해지는 게 한참 양반이지 양반. 그게 밀껌이야. 껌처럼 끈끈 하 거 그거이 많으면 강력분이 되는 거지 밀가루가. 그런 건 빵이나 국수 만드는 데 제격이야, 제격. 잘 뭉치고 쫀득하니까 말이지 응. 그런 게 별 로 없어서 무른 건 말하자면 과자나 튀김에나 쓰는 박력분이 나오는 거 지." 신풍근 씨는 신이 났다. 엉덩이를 들썩이며 손끝으로 혀공을 거머쥐어 반죽하듯 비틀어 짜는 바람에 평상이 삐거덕거렸다. "우리 집은 학생도 눈치챘겠지만 어흠 하고 팔자걸음 걷던 그런 가문은 절대 아닌 거지. 그러니 재덕이 저 녀석도 목수쟁이 되려고 건축학관가 하 는 델 갔지." 수건으로 물기를 닦고 난 재덕이 손바닥으로 가슴팍을 탁탁 치며 말했 다. "골체미 자랑하는 게 아니라면 제발 옷 좀 입어줄래." "아암 그것도 인기를 끌 만치 끌어야지. 집이 없으면 사람이 대관절 사 람 행색을 할 수 있겠니? 모르긴 몰라도 빵만큼이나 종요로운 것일테지. 그건 내가 십분 인정을 하지. 우리가 보통 의식주, 의식주 잃게 일컫는데 말이야 이거 거꾸로지. 집이 있으면 사람이 굳이 이곳 저곳 가리지 않아도 살 수 있지 아암. 우리 재덕이가 데모만 안 하면 그거 이상 없는데 말이 야. 그거 참... 나이가 젊으니깐 피는 엿가마솥 물처럼 펄펄 끓지 환장할 지 나이지. 그 나이를 잘 견디는 게 바로 슬기로운 사람이야. 하지만 옛말 에 미련 먼저 나고 슬기 나중 난다는 말이 있으니 쇠귀에 경 읽기지, 결 읽기. 근데 너 못질이나 제대로 하니?" "건축하고 못질하고는 달라요. 할아버지." "쯧쯧. 대목수도 기분은 다 못질에서 나오는 게야." "근데 할아버지 기왕 말끔 나오신 김에 학생들 데모에 재해선 어떻게 생 각하시는지 말씀 좀 해주세요." "글세... 난 잘 모르지. 왜들 그러는지. 어떨 땐 학생들이 어련히 잘 알 아서 그럴까 싶어두 아 내 새끼가 전장터 같은 곳에 내몰린다는데 어느 부 모 할애비가 좋아들 허겄어? 안 그래? 어른들이 좋아하지 않는 일은 그만 둬야지 아암. 자칫하면 객기가 되기 쉬워요. 하긴... 객기도 한번 부릴 줄 모르는 싹수 없는 젊은것한테는 십 전 한푼도 허투로 꿔주지 말라는 얘기 가 있긴 있지. 세상살이라는 게 때와 곳을 따라서 객기를 가릴 줄 척척 알 면 좋은 건데 말이야. 하지만 그게 어려운 거야 아암... " 잠시 대화가 끊어지자 기다렸다는 듯이 한산댁이 수박 화채 그릇을 들고 왔다. "임자도 잠깐 앉아요." "앉긴요? 지금 또 꺼내야 하는데." "내가 찜솥에서 꺼내줌세. 우린 워낙 화로를 끌어안고 사니깐 이렇게 수 분을 맘껏 섭취해야 견디구." 신풍근 씨가 화채 그릇을 들어 훌쩍 비워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녜요. 두사람은 앉아 있으래두. 찜솥만 열고 곰세 돌아올 테니깐." "그게 아니고요. 제가 도울 수 있으면... 물컵이라도 나를게요 할머니." "아냐. 아냐 일없어." "어차피 할아버지의 일손을 저희가 빼앗았으니까요. 벌충을 해야죠." 현경은 신풍근 씨의 만류에도 아랑곳없이 재덕에게 가방을 맡긴 뒤 한신 댁의 뒤를 따라 층계를 내려갔다. "여기 찐빵 빨리 주세요." "난 왕만두요." 성마른 아이들이 자리에 앉자마자 지르는 소리가 아래에서 올라왔다. 꼬 마 손님들을 받는 시간대인 모양이었다. "그래그래 잠깐만 앉아 있거라 응." 현경이 팔 소매를 걷어붙이며 중간에 끼여들었다. 컵에 물 따르고 빵 쟁 반을 식탁에 날라놓으면 바로 옆 식탁의 빈 쟁반을 거두어 차곡차곡 쌓아 야 했다. 게다가 돈 계산까지 해주랴 현경은 이마에 흐르는 땀을 훔칠 틈 도 없었다. "그거 저를 주시구요... " "아유, 손님이 이러면 안 되는데." "호호 그러면 딴 건 말고 접시 비우고 나가는 애들한테 돈이나 받아서 챙겨놔줘요. 여기 값 써 있는 거 보고설랑." 한산댁이 널따란 솥뚜껑 꼭지에 행주를 감은 다음 살며시 옆으로 들어냈 다. 벌써 세 번째 쪄내는 솥이었다. 요술램프에서 나오는 뭉게연기처럼 피 어오른 김이 문 처마를 감아들며 허공 중으로 사라졌다. 콧속으로 구수한 빵 냄새가 밀려들었다. 솥 안에는 어른 주먹만한 하얀 찐빵이 탐스러운 알 몸으로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한산댁이 김이 다 빠져나간 솥 안으로 고개 를 쑥 들이밀고 먹이를 물고온 어미새처럼 찐빵들을 한눈에 내리훑었다. 그리곤 신풍근 씨를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터진 것 하나 없이 다들 잘 익었는데요?" "아무렴. 어느 손이 안쳤는데." 배를 채운 아이들은 아쉬운 듯이 자리에서 일어났고 그 자리를 또 다른 아이들이 두셋씩 들어와 채웠다. 빵을 다 걷어 큰 쟁반마다 수북이 쌓아 놓은 신풍근 씨는 밀가루가 깔린 목판 위에 미리 빚어놓은 찐빵을 가져나 와 찜솥 겅그레 위에 차례로 올려놓았다. "물 빨리 더 줘요." "여기 설탕 좀 더 찍어 먹을 게요. 많이 줘요, 듬뿍." "설탕통 거기 있잖이?" "비었어요." "아무래도 개미가 환생을 한 모양이다, 재호 너는." "그래 듬뿍 먹어서 이빨 다 썩은 다음 나중에 이 할미처럼 틀니나해 낄 래 응, 호호." 현경은 문턱께에 놓인 앉은뱅이 의장에 앉아 아이들이 건네주는 동전과 꾸깃꾸깃한 종이돈을 바로 펴서 낡은 장부 밑에 모아놓았다. 꼬마 손님들 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제일 끝에 남은 아래위 흰 운동복 차림의 아이가 다가와 한산댁과 현경을 번갈아 쳐다보며 쭈볏쭈볏거렸다. 현경은 식탁을 훔치던 한산댁이 얼른 다가왔다. "그래 많이 먹었지? 얼른 가봐. 이건 동생한테 주고." 한산댁은 미리 빵과 만두를 싸넣은 검은 비닐 봉지를 아이의 가방 속 깊 숙이 밀어넣고 등을 드드려 보냈다. "으응... 걔는 우리 집에서 점심 먹고 가는 애라서. 그나마 고물상하는 애비가 축대에서 술 먹고 한밤중에 떨어져서 꼼짝 못하지 뭐. 도시락도 못 싼다 그러길래 그냥... " 현경은 아무 말 없이 빙그레 웃었다. 밀가루 희끗희끗 묻어나 새치와 구 분이 잘 되지 ㅇ는 한산댁의 머리 쪽으로 현경의 손이 사려다 문득 멈췄 다. 물탱크 옆 아주끼리 밭에 놓은 평상으로 자리를 옮긴 신풍근 씨가 문 밖에서 얼굴을 비죽 들이밀며 그만 부려먹고 내보내라고 우수개 하였다. "이거 피마주죠 할아버지? 우리 어릴 적에 씨도 막 먹었잖아요." "요즘이야 누가 먹는다구. 너희 할망구가 짜서 머릿기름으로 쓴다던가? 샴푸를 기어코 쓰지 않으니까." "자. 앉아요... 앉아들. 그렇게 서 있지 말고." 한산댁이 찜솥에서 막 꺼낸 찐빵 접시를 내려놓았다. 얼음을 띄운 물통 과 노란 플라스틱 컵 세 개도 따라왔다. "솔직히 배고팠어요 후후." "작작 먹어라 이현경." "어머, 이제 겨우 두 개째아." 팥소가 뜨거워 입을 한껏 벌린 채 쩝쩝 소리를 내며 씹던 현경이 손바닥 으로 입을 가리며 멋쩍에 웃었다. "그래 많이 들어. 예부터 먹는 죄는 고불통(흙을 고아서 만든 담배통)으 로 하나라고 했어요. 이건 주인이 내놓은 것이니 많이 먹을수록 예의가 바 른 거제 아암. 단지 너무 쩝쩝 소리를 내며 먹으면 고무락이라는 귀신이 알아들어서 가난해진다고 하니 뜨거우면 찬물을 부으며 먹으라우." 중개는 됨직한 누렁이 한 마리가 절룩거리며 지나갔다. 앞발 하나가 발 목이 뭉텅 잘려져나간 개가 코끝으로 바닥을 헤집다가 문턱에서 안을 기웃 거렸다. 신풍근 씨가 평상에서 내려 신발을 꿰신고 빗자루를 찾는 척하며 소리를 질렀다. "짱깨네 문 앞에서나 걸근댈 일이지 여기가 어디라고!" "영감님 거 뭔 말이당가요? 듣기 상그러바서 마." 대뜸 시비조의 말이 날아든 것으로 보아 아마 신풍근 씨가 사람을 번히 보면서 일부러 부아를 지르는 말을 한 듯했다. 현경이 돌아다보니 대머리 진 중년의 사내가 철가방을 들고 스쿠프 오토바이를 타려는 찰나였다. 종 점반점이라는 붉은 현판을 내건 허름한 중국집 앞이었다. 오토바이를 타려 던 대머리 사내가 철가방을 내려놓더니 문 앞의 주렴을 화풀이하듯 잡아챘 다. "개가 기름 냄새에 눈이 아조 확 뒤집혔구먼. 누가 먹다 남은 짜장사발 이라도 있으면 괜한 하이타이 설거지 할 것 없이 개나 말끔히 핥게 내비두 지." "하아. 와 또 가만있는 사람 속을 긁고 그라요?" 철가방을 다시 집어든 사내가 재덕과 현경을 설핏 훑어보다 현경과 눈이 마주쳤다. 누렁이가 갑자기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주렴 문 앞으로 다가 서자 희고 가느다란 손이 불쑥 나와 퍼런 플라스틱 그릇을 바닥에 놓아주 었다. "멀리 놔! 개새끼가 문전에서 알랑대며 개털 날리면 하루 죙일 재수 없 어." 왼손에 철가방을 쥔 사내가 가랑이를 번쩍 들어 허벅지를 스쿠프 오토바 이 안장 위에 올리며 소리쳤다. 그러자 홀태바지를 입고 머리를 길게 딴 여자가 나와 누렁이가 벌써 코를 쑤셔박은 그릇을 빼앗아 들고는 바로 옆 할레루야교회의 대문가 화단 아래로 밀쳐놓았다. "짜장면 안 뽑고 어딜 내빼?" 공작이발소 이발사가 어느새 하얀 가운으로 갈아입고 허청허청 다가오며 소리를 질렀다. 중국집 주인이 힘껏 페달을 밟자 푸른 연기가 피어올랐다. 이발사가 양미간을 찡그리며 코앞에서 손부채를 활화 부쳤다. "보믄 몰러? 배달. 우린 시도 때오 없ㅈ아. 거긴 오늘 가위질 안혀?" "아 여태껏 잔치 보로 갔었는데 점심도 쫄딱 ㄱ었지 뭐야. 케이크인지 뭔지 빵부스러기 한 상자 덜렁 손에 쥐어주고 말이야. 그런 잔치는 또 보 다보다 첨이야. 두 사람 면도 해 주고 지금 겨우 짬내서 짜장면 곱빼기라 도 한 그릇 때려잡아야지 계속 가위질을 허든가 말든가 허지! 영감님 안녕 하슈? 지가 오늘은 이 집으로 들어갈란디." "일없어!" 신풍근 씨가 손사래를 치며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영감님 손자인가.? 쩌그... " "그런가 보대... 그 뭣이냐 한총련... " 이발사가 주렴을 들치고 안으로 사라지자 스쿠프가 고개를 백팔십도로 돌리고 부르릉 방귀를 연달아 뀌더니 후문 쪽 길 아래로 달려나갔다. "저 누렁이가 그래도 내 덕분에 이번 오뉴월을 미끈하게 넘겼지." "왜요?" 신풍근 씨가 코를 양쪽으로 벌름벌름하더니 느물거리는 웃음을 지었다. "초복이 오기 전부터 저 청요릿집 양씨가 누렁이를 돌산으로 끌고가 때 려잡겠다고 단단히 벼르고 있었는데 내가 미리 말뚝을 박고 나왔지. 복날 전에 다리몽댕이가 분질러진 삼족구을 매달면 집안에 동티난다고 했지... " "삼족구요?" "그래 다리가 셋인 개 말이지. 발목이 뭉개졌으니 그게 삼족구지? 그걸 잡아먹으면 삼재가 든다고 엄포를 놓았더니 개껍데기라면 입가가 늘어지고 흰자위를 까뒤집는 양씨도 그예 손을 못 대고 삼복을 그냥 넘어가데. 재작 년인가 언젠가 한번 주방에 불이 나 크게 혼뜨검을 당한 적이 있으니 그럴 만도 하지. 그렇잖아도 그 누렁이가 뉘 때문에 그 꼴이 됐누? 짱깨집 막내 녀석이 돌산 가풀막에서 촐랑대다 미끄러져 죽을 뻔한 걸 같이 뒹구느라 다리까지 부러진 갸륵한 개니깐 말이야. 한 일 년쯤 명줄을 더 늘일 만하 지 아암... " "먹으면서 들어요. 얘기 마저 해야 하니까... " 신풍근 씨가 입을 열기 전에 다시 파이프에 담배를 재기 위해 허리춤을 뒤지는 사이에 현경은 녹음기에서 테이프를 꺼내 새것으로 바꿔끼웠다. "그래, 얘기가 되면 들어두고 말면 잊어버리구. 그러니깐 그때가 벌써 어언 백 년 전이라고 해야겠네 응. 백 년이면 정말 긴 세월이지 사람한테 는. 기억도 닳지. 닳지말고. 그래도 그때가 갑오년인 것만은 틀림없을 테 지. 그렇지 않고서는 그런 얘기가 나올 수 없었을 테니까 말야. 갑오년에 선조들이 겪었던 큰 난리 말여. 그런 노래가 있었다지." 신풍근 씨가 목을 자라처럼 움츠리고 으흠으흠 목청을 가다듬었다. "갑오년에 가보세 가보세, 을미년에 을미적 을미적하다간, 병신년에 병 신 되오 하는 노래 말이야. 그게 메야? 누군들 가고 싶어서 갔겠냐 이거 지. 가도 죽지만 똥 눈 자리 깔고 뭉개듯 미적미적하다간 또 병신 되니깐 오도가도 못하다가 떠도는 넋이 된 게지 아마. 해방이 됐다고 하던 한 해 앞서서 돌아가신 할머니는 그 유명하신 장태장군의 샥시셨지." "장태장군이요? 그러면 재덕이 고조할아버님께서요?" "거봐. 내가 이래 봬도 장군의 후손이여 엇험!" 재덕이 어깨를 으쓱하며 너스레를 떨었다. 하지만 신풍근 씨의 표정은 진지했다. 그는 생 담뱃가루가 입 안으로 들어갔는지 혀끝으로 입술을 핥 은 뒤 퉤퉤 하고 내뱉었다. "그분의 함자는 신자, 덕자, 배자셨어. 봉기에 참례하셨을 때가 스물 두 살의 약관이셨다지. 어른의 출신에 대해서는 들은 바가 나도 엷다. 엷어. 다만 지금 저그 전라도 김제 출신이신 어른은 소싯적 여느 소년처럼 다니 시며 글을 익히셨는데 글을 잘하고 똑똑해 모두들 갸륵하게 여겼다고 하시 더라. 장성하신 다음에는 예의와 염치를 누구보다 소중히 여기시며 현실 에 눈을 뜨셨다가 어느 때인지 동학에 입도했다고 하는데 아무튼 녹두장군 이 첫 백산봉기 때부텀 군사를 거느리고 달려가셨다가 이후로도 소접두로 서 휘하에 적게는 이천 명에서 많게는 약 일만의 군사를 이끌었다고 하셨 지." 신풍근 씨는 잠깐 입을 다물었다. 재덕의 입 안에서 목울대를 치며 꼴닥 넘어가는 생침 소리와 녹음 테이프 감기는 소리만 들리 정도로 침묵이 내 려앉아 있었다. "특히 어른께서는 부적의 명수였는데, 무슨 말인고 허니 하루는 휘하의 농민군 앞에서 부적을 써붙인 수탉을 오십 보쯤 떨어뜨려놓고 호령하시길 한번 방포질(총질)을 해봐라, 부적이 있으니 저 수탉이 죽지 않을 것이로 다 하셨대. 진짜 총으로 다섯 발을 쏘게 했지만 수탉을 맞히진 못했지. 그 게 정녕 부적의 힘이었는지 아니면 총질이 서툴러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아 무튼 그 부적을 앞자락에 단 군사들이 용기백배한 결과 하동에서 관군 쪽 에 붙은 포수들로 관군 쪽에 붙은 포수들로 이뤄진 민포군을 깨고 한때 진 주성에도 입성하셨다고 들었지. 영호남에 두루 걸쳐서 호랑이처럼 맹렬히 싸우신 게야 아암." 신풍근 씨는 시선을 멀리 던지느라 눈가를 간잔지런하게 폈다. "그분을 농민군 사이에서 더욱 유명하게 한 것은 남원전투에서 장태라는 무기를 사용해 승리를 거둔 일이었지. 왜군의 지원을 받은 관군은 신식 무 기로 무장을 해서 엄청난 불을 내뿜으며 덤벼들고 농민군은 고작해야 구식 화승총이거나 대부분 죽창 아니었겠니? 그때 어르신께서 짚과 대나무를 엮 어 묶은 장태를 굴리면서 과감히 관군에게 다가가 육박전을 벌인게지." 신풍근 씨는 입에 물고 있던 파이프를 빼 앞으로 죽창을 휘두르듯 쭉 내 지르며 한쪽 팔로는 재덕의 어깨를 감싸안았다. 재덕은 몸을 기울여 할아 버지의 팔이 자신의 어깨에 두루 걸칠 수 있도록 했다. "장태가 뭐에 쓰는 건가요 할아버지. 말씀 도중에 죄송한데요." "그게 원래 곡식이나 종자 같은 거 넣어 저장하거나 말릴 때 쓰는 게여. 그러니까 농민군은 장태 뒤에 숨어 밀고 가고 관군이 암만 총질을 해도 장 태 안 짚더미에 박히거나 겉에엮은 대마무 맞고 튄다 이거지. 얼마나 기발 해 응? 그래서 장태장군이라고들 떠받들었지." "고조할머니는요?" "그게 나도 열대 살 때 처음 들어놔서 말이야. 할머니가 그때까지 끝끝 내 숨겼거든. 알려지면 목숨이 달아나니깐. 장태장군하고 할머니가 처음부 터 정식 혼약을 치른 건 아니고... 농민군을 따라다니면서 밥도 짓고 장군 의 뒷수발도 들고 그랬어. 어떤 놈은 할머니께서 도망친 관비 출신이라고 함부로 주둥이를 놀리는가 본데 언어도단, 말도 안 되지. 관의 계집종이 어떻게 그 많은 농민군의 입을 감당하는 휫손을 발휘했겠니 응? 아니 그러 니?" "어떻게요?" "풍찬노숙이라는 무서운 말이 있다. 찬바람이나 이슬을 무릅쓰고 한데서 먹고 자는 일 말이야. 당시 들판으로 내몰린 농민군이 딱 그 신세 아니었 겠니? 항상 왜놈이나 관군, 민보군 한 것 없이 쫓겨다니는 신세니 말이야. 언제 제대로 터를 잡아서 무쇠솥을 걸고 밥을 끓여! 걸치작거려서 안 되 지. 그런데 할머니께서 간편한 쇠가죽솥을 생각해내신 거야. 쇠가죽솥." "쇠가죽솥이요?" "아암. 쇠가죽 하나가 무쇠솥 하나를 감당하는 거지. 농민군이 진을 치 면 그 자리에 바로 말뚝을 박고 통쇠가죽 끝을 걸고 물을 부은 다음 밑에 서 불을 때지. 물이 절절 끓으니까 암만 밑에서 장작을 때도 음식을 끓이 는 쇠가죽이 타버릴 염려는 없어. 그러고 나서 척척 보자기처럼접으면 들 고 다니기도 간편했을걸." "정말 그랬겠내요." "게다가 할머니께서 그 전쟁통에서도 쌀가루나 밀가루를 보면 모아다가 반죽을 해서 불로 달군 얇은 돌을 구해다가 빵인지 개떡인지를 해서 기운 을 돋우었다지. 들어봐. 그 안에다 산에서 나는 도토리나 상수리 같은 거 있잖아? 그걸 모아다 겉껍질을 벗겨서는 빻아서 팥고물처럼 만든 다음 개 떡 안에 넣었다지. 솔찮은 요깃거리었을걸 아마. 그렇게 만들면 군사들이 지니고 다니기도 좋고 소화도 썩 잘 되지 않았겠니? 그게 어느 기록엔가 나와 있다고 접때 날 찾아온 무슨 역사학자라는 사람이 적어주고 가기도 했는데. 그래 마마병인가 보다, 마마병." 신풍근 씨는 손바닥에다 한자를 또박또박 그려가며 설명을 해줬다. "이렇게 쓰는 마마라구. 계집 녀 변에 말 마 자 쓰는 거 말이야. 거 뭣 이더라 옛날에 앓고 나면 얼굴에 곰보자국 생기는 병을 마마손님이라고 했 단다." "천연두요?" "으응, 천연두? 그래 그 병을 마마손님이라고 했어, 마마손님. 거기다 떡병( )자 있잖남? 마마병. 기록엔 그렇게 나와 있다고 하대, 그 학자라 는 사람이." "왜 마마병이에요?" "그건... 그건 말이지. 에. 그러니깐 그 할머니가 그 마마손님을 맞아서 얼굴이 살짝곰보셨거든. 그랬는지... 아니면 그 떡... 떡이라기보다는 빵 쪽에 가까울 텐데, 아무튼 그것의 모양이 울퉁불퉁한게 꼭 마마손님 맞은 아이의 곰보딱지 얼굴을 닮아서 그랬는지도 모르지." "아항! 그 마마병의 전통이 지금 이렇게 맛좋은 찐빵으로 다시 태어난 거로구나 히히." 신풍근 씨가 재덕의 너스레에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등을 다사롭게 두드려 주었다. 그때 가방에서 사진기를 꺼내들고 일어선 현경이 뒤로 주춤주춤 몇발짝 물러섰다. "할아버지 사진 한 장 찍을 계요. 저기 가게 앞 소파에서요." "사진 박는다고? 거 괜스레... " 신풍근 씨는 무릎 위에 놓았던 하얀 천을 몇번 포개 머리 위에 둘러쓰며 평상에서 내려섰다. "어이그, 그놈의 궁뎅이 땃땃더 허다 허허." "야야 현경아, 나는 빠진다, 빠져. 어디 쪽 팔 일 있냐?" "너는 통사정해도 안 껴줘. 저리 비켜." 현경은 무릎을 반쯤 꺽은 채 사진기에 눈을 들이댔다. 줌 렌즈가 달린 사진기였다. 오른손 검지를 밀자 렌즈 안의 신풍근 씨가 앞으로 당겨져 나 왔다. 그가 콧수염을 씰룩거리는 바람에 잇바디가 살짝 드러났다. 현경은 콧수염에 초점을 맞춰 셔터를 지그시 눌렀다. 그 다음 검지 마디를 쭈욱 펴 렌즈 안의 그림을 넓게 잡았다. 위쪽으로 간판이 보일락말락했다. 현경 은 뒤로 몇발짝 더 물러나기 위해 일어났다. "간판 들어가니?" "아니, 그래서 뒤로 좀... 엄마야." 뒷걸음질을 치던 현경이 누군가의 발을 밟았다. 종점반점에서 막 요기를 하고 나오던 이발사였다. 이미 배갈을 거나하게 마셔 눈자위가 불콰했다. 현경은 고개를 돌리려다 이발사의 툭 불거진 광대뼈에 이마가 부딪칠 뻔했 는데 그의 입에서 양파 냄새와 뒤섞여 풍겨나오는 역한 술 냄새에 목을 움 츠렸다. "음머 이 아가씨 발등 깨뜨릴랴구? 사람이 뒤에 이렇게 번히 섰는디?" "죄송해요 아저씨. 제가 모르구서... " "미안하면 다여? 헤헤 농담여. 농담. 뒤통수에 눈깔 뚫린 사람이 있는가 뭐. 근디 영감님 이쪽 학생이 바로 거시기여?" "뭐가 거시기여. 거시기는! 대낮부터 어디서 남세스럽세 술주정이여. 동 네 창피스러운 줄 알아야지." 신풍근 씨의 콧수염이 부풀어오르면서 침 몇방을이 튀어올라 안자았다. 현경은 얼른 셔터를 한 번 더 눌렀다. "영감님도 술주정은 누가 한다고 그 야단이셔? 그냥 물어보는 거 아녜 요. 영감님을 하냥 애달캐달하게 만든 바로 그 한총련이냐구. 궁금하니 껜." 재덕이 고개를 홱 돌렸다. 모자챙이 밑의 두눈에 힘이 들어갔다. "뭐가 궁금하신데요?" "아 그러니깐 그러잖아도 경기가 나빠서 말이지 응. 사회가 뒤숭숭허고 우리 같은 삶은 하루 벌어 입에 풀칠하기도 바쁜 판에 대학생들은 데모는 뭐 할라고 허는가 이거지 뭐. 안 그려?" "... !" "이 사람아 자네 왜 이러나? 가서 일이나 헐 일이지 웬 시비거리를 만들 고 난리야?" 종점반점 양씨가 얼른 뛰어나와 이발사의 팔짱을 낚아챘다. "궁금허지. 아 당신은 안 궁금혀? 더군다나 내 동생이 몇 달 뒷면 대학 생들헌테 허구한 날 얻어터지는 그 전경에서 제대를 한다구." "궁금하더라도 나중에 다시 묻든지 말든지 허라구. 웬 행패여! 나랑 한 잔 더 해." "저런 뇌꼴스런... 끌끌." 신풍근 씨는 양씨에게 주렴 속으로 사라지는 이발사의 뒷모습을 보며 양 미간을 찌푸리며 끌탕을 하였다. 재덕은 호주머니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담뱃갑을 더듬었다. "할아버지 전 잠깐 요 위에서 바람 좀 쐬고 올게요." "그럼,그럼." "그래서 그 장태진군님은 어떻게 되셨나요?" 현경은 사진게에 얼굴을 들이댄 채 말을 걸었다. "으응, 어디까지 얘기했더라... 가설라므네... 그래 애초부터 살아나시 기가 어려운 싸움이었을 게야. 부적 한 장 달랑 앞섶에 달고 총알비 속으 로 달겨드는 싸울을 했어야 했으니. 배 안에 장태장군의 씨를 겨우 보듬으 신 할머님만 간신히 목숨을 건지시고, 할아버지가 애초 병기하셨던 솔뫼마 을 뒷산에서 총질을 하며 쫓아오는 일본군에게 그만 뒷다리에 선불을 맞고 붙잡혔다는 소식이 들리자 할머니는 틀림없이 어른께서 돌아가신 줄 아셨 지. 하지만 남몰래 지낼 제삿날이라도 알고 싶었지만 옴짝달싹 못하고 숨 어 있는 처지에 어디 그럴 수가 있나? 그래서 하루는 할머니께서 황토흙 을 담은 소반 위에 밀가루를 훌훌 뿌진 다음 매일 아침 들여다봤었지. 그 얘긴 두고두고 많이도 하셨어. 아, 그랬더니 섣달 초사흗날에 제삿날이 섣 달 초사흗날이야. 그 밀가루를 거둬 마마병을 만드신 다음 정화수 한 그릇 을 떠놓고 울음이 삽짝문 밖으로 샐세라 삼키며 첫 제사를 그렇게 지내셨 지." 재덕은 빵집 뒤 돌산 쪽으로 오르는 짧은 가풀막길을 올랐다. 시야가 툭 트인 길가에 서서 아래쪽을 내려다보았다. 삼양동이라고 불리는 산자락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무너진 집들이 몇채 눈에 띄었다. 재개발지역인 모 양이었다. 재덕은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재개발사업이 이뤄지는 바로 옆 구와 경계선을 이루는 한길가에 있는 할아버지의 빵집도 어쩌면 일이 년 사이에 철거가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면 지금 할아버지가 근근이 손에 뒨 자금력으로 어디 딴 데다 이런 빵집을 차릴 수 있을까? 아니 그만 한 근력이 앞으로 얼마나 갈 것인가? 작년인가 언젠가 한번 지나가는 말로 이민을 가자고 조른 적이 있었다. 할아버지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재덕 자신은 맘먹기에 따라서 얼마든지 로스앤젤레스에서 청과상을 크게 하고 있는 의붓아버지나 어머니의 초청을 받아 이민을 떠날 수 있었다. 재덕아 사람은 말이야. 그게 그러니까 말이야... 늙을수록에는 말이야. 한가지 정신밖에 없는 게지. 이 축축한 땅에 먼저 묻힌 조상님네한테 내가 이 망가진 육신이나마 바쳐야지. 공양을 디리야지 아암... 아암. 이 땅에 핀 풀과 알곡을 그만큼 악착같이 뜯어먹고 훑어 먹고 살았으면 껍데기 같 은 육신이래두 말이지. 어데다 묻혀 흙 한줌이나마 어떻게 더 보태야 하는 지 알아야 사람 값을 눈곱만큼이나마 하는 게지. 짐승도 그 정도는 저절로 하는 법인데 무슨 말을 구차스럽게 빼고 보태. 재덕은 손가락 사이에 잡히는 대로 굵은 흙알갱이를 몇알 움켜쥐고 허공 중에 뿌렸다. 길바닥이 아니었더라면 왠지 드러눕고 실었다. 발치 밑은 뿌 렸다. 길바닥이 아니었더라면 왠지 드러눕고 싶었다. 발치 밑은 사방 공사 를 해놓은 위로 심은 나무들이 어른 키 정도로 자라나 있었다. 초등학교 때만 해도 그곳은 루핑(검은 기름종이)으로 지붕을 인 낮은 블록벽이 집이 흩어져 있었다. 아이들도 고개를 숙여야 이마를 찧지 않고 드나들 수 있을 정도였다. 그 빈민촌 중간에 모래자루를 매달아 놓은 터가 있었다. 그 터 옆에는 이파리가 무성하게 오른 무밭이 있었다. 오후부터 동네 아이들이 몰려와 고무줄놀이나 치기장난을 했으며 일부는 제법 누렇게 바랜 도복을 갖춰 입고 기합소리를 지르며 태권도 발차기를 바로잡아줬다. 물론 권투 연습도 이뤄졌다. 학교 급식 빵처럼 검고 두터운 권투장갑을 낀 채 둘씩 맞붙기도 했다. 그때 재덕은 잠시 권투도장엘 나가고 있었다. 비탈을 타고 내려가 그 마당가로 다가선 재덕에게 누군가 톡 쏘아붙였다. 너 뭐야? 구경도 하면 한 되냐? 얼굴이 까무잡자한 데다 이마 위의 머리마저 심한 곱슬이어서 튀기가 아 닐까 싶은 덩치 큰 아이가 흙이 들어간 끈 없는 운동화를 털며 물어왔다. 재덕은 곱슬머리의 유난히 흰 이빨을 쳐다보며 가슴을 쭉 내밀었다. 뭐 구경? 몇학년인데? 어느 동네서 살아? ... 어쭈 도전이야. 프로포즈야, 애교야? 사뭇 시비조였다. 재덕이 뻣뻣하게 서서 노려보자 곱슬머리는 코방귀를 뀌며 모래주머니에 이마를 툭툭 찧고 있던 빡빡머리 아이한테 고개를 돌렸 다. 야, 챔피언! 이거 별꼴이 반쪽인데. 챔피언이라고 불린 아이는 맨발이었고 아랫도리는 복숭아뼈로 한뼘쯤은 더 올라간 깡똥한 태권도복과 위에는 갈비뼈 윤곽이 오롯이 몸에 좍 달라 붙는 낡은 자줏빛 폴라를 입었다. 키도 재덕이 정도의 중간키였지만 굵은 힘줄로만 이뤄진 가느다란 발목은 강인한 인상을 주었다. 챔피언이 구름을 밟는 듯 발끝으로 땅을 디디며 가뿐하게 다가왔다. 구경하러 왔으면 그저 얌전히 구경이나 하다 가지 그래. 어? 이봐 챔피언 저 애 도전을 안 받아 주는 거야? 넌 좀 찌그러져! 챔피언이 한마디 하자 덩치 큰 곱슬머리는 군말없이 어슬렁어슬렁 태권 도 연습을 하는 아이들 틈새로 끼여들었다. 챔피언은 바로 옆의 텃밭으로 발걸음을 옮기더니 팔뚝 굵기만한 무를 쑤욱 뽑아올렸다. 곱슬머리가 눈이 휘둥그래져서 쳐다보았다. 챔피언은 이파리를 훑어내 밭에다 휙 내던진 다 음 이빨로 무 껍질을 벗겨 퉤퉤 뱉어냈다. 그의 입안에서 하얀 무의 속살 이 으깨지면서 입가로 거품이 밀려나왔다. 우린 구경하는 건 아무도 안 말리건든. 챔피언이 씨익 웃으며 재덕의 가슴을 손가락 끝으로 콕 찔렀다. 재덕은 몸을 비틀며 손가락을 쳐냈다. 챔피언의 얼굴이 약간 일그러지는가 싶더니 바닥에 침을 탁 뱉었다. 그는 자신의 어깨 뒤쪽 너머로 손가락을 까닥까닥 움직였다. 곱슬머리가 달려왔다. 곱슬머리는 자신을 향애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오는 반쪽짜리 무를 황급히 받았다. 너 태권도 좀 하냐? ... ! 재덕은 말없이 곳곳에 찢어져 꿰맨 흔적이 있는 권투장갑을 집어올렸다. 여긴 룰이 있어. 우선 삼 라운드인데 각 라운드는 이 분 싸우고 일 분 쉰다. 세 번 따운되면 자동 케이오구... 그리고 울기 없기 또 쩨쩨하게 집 에다 일러서 아까징끼(머큐로크롬)값 물어내라고 하기 없기 알았어? 그럼 야 깜상, 너 신간 재... 경기는 정확히 이 라운드 일 분 이십칠 초 만에 결판이 났다. 운동에는 어느 정도 자신이 있다고 믿었던 재덕은 그 이백칠 초가 얼마나 긴 시간인 지 뼈저리게 느껴야 했다. 챔피언의 발놀림은 현란했다. 그는 아예 맨얼굴 을 바로 앞에다 대주는 챔피언의 얼굴을 단 한 대도 때릴 수 없었고 그 대 신 챔피언은 정확히 평균 오 초마다 한 대씩 주먹을 날렸다. 주먹을 길게 뻗으면 어느새 귓가로 바짝 달라붙어 올려치기를 날렸고 관자놀이께를 겨 냥하고 힘껏 휘어치면 챔피언은 어느새 재덕의 품을 파고들어 이마를 맞댄 채 히죽 웃으며 옆구리를 야무지게 질렀다. 아마 재덕이 케이오 당하기 직전에 첫다운을 당해 쓰러져 있었던 칠 초 간을 뺀다 해도 대략 마흔 대 쯤은 얻어맞았다. 챔피언은 친절하게도 재덕이 맞을 부위를 미리 가르쳐주 며 공격했다. 배!... 이런 턱이 또 비었잖아... 바디! 아니지 그쪽말고 왼 쪽!... 관자놀이! 헉헉... 코피 조심해! 하나뿐인 글러브 젖으면 곤란하다 구. 일 라운드의 절반도 지나지 않아 항복하고 싶었다. 울고 싶었다. 그러나 울 수도 없었다. 어느새 명치를 파고든 챔피언의 주먹에 숨이 막혀 목구멍 까지 차오른 울음이 아랫배로 쑤욱 빨려들어갔다. 그날안 어머니가 의붓아버지를 데리고 할아버지한테 인사를 올리러 오는 날이었다. 재덕을 낳은 아버지는 재덕이 돌을 넘기자마자 요절했으니 어머 니는 십여 년 만에 재가를 하는 셈이었다. 며느리를 떠나보내는 할아버지 는 무엇이 좋은지 입이 함지박만하게 벌어졌다. 의붓아버지는 재덕이 지레 짐작했던 가발공장 사장답지 않게 대머리도 배불뚝이도 아닌 잘빠진 인물 이었다. 재덕은 마치 꿈에도 그리던 아버지가 다시 돌아온 듯한 느낌을 받 았다. 진짜 울 아버지였으면! 재덕은 아랫입술을 물어뜯었다. 어른신께서 저희가 새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혼인을 승낙해주십사하 고... 이 늙은이가 무슨 권한이 있다고... 본인들이 굳게 화합해 부디 잘살기 를 바라는 수밖에. 내 술 한잔 받게나. 네 살바기 아버지가 할아버지와 풀빵 기계 앞에서 찍은 사진 밑에서 어 머니와 가발공장 사장은 할어버지에거 큰 절을 올렸다. 재덕은 오줌을 누 겠다며 빠져나와 지금 앉아 있는 자리로 올라왔었고 아래 빈민촌을 내려보 다가 귀밑 뺨이 발그레 상기된 채 비탈을 타고 그 마당가로 다가섰던 것이 다. 재덕은 또다시 손에 잡히는 대로 굵은 마사토 흙알갱이를 집어 던졌다. 가발업이 사양길에 접어들고 심한 불황에 시달리자 과감히 공자을 정리한 의붓아버지는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중학교 일학년이던 재덕은 다니던 학 교나 졸업하고 가겠다며 이 땅에 남았다. 그러고는 작은아버지 댁에 들어 갔다. 하지만 고등학교까지 이 땅에서 졸업하고 한 해 재수를 하면서도 바 다로 건너와 대학 공부를 하라는 어머니의 청을 굳이 뿌리치고 건축학과에 입학을 했다. 잘한 건지, 못한 건지... 가서 의붓아버지 밑에서 과일 상자 나 지게차로 옮겨주며 장사나 배워? 아니면... 재덕은 손가락 끝까지 거의 타들어온 담배를 한번 길게 빨어들인 다음 구두 밑창에 비벼 껐다. 작은 아버지가 아니었더라면 자신도 구속을 면치 못했을 거라고 생각하 니 착찹했다. 내가 쥐구멍으로 새듯 빠져나간 비좁은 감방 마루에선 대신 다른 학우들이 시달리고 있겠지 하는 자책감이 들었다. 지난해 가을 부산지검으로 발령이 나 혼자 부임을 했던 작은아버지가 급 거 상경해 쇠파이프와 화염병을 든 모습이 사진에 뚜렷이 잡힌 주요 가담 자였던 재덕을 단순 가담자로 분류하도록 손을 썼다. 경찰서에서 훈방되던 날 정문 앞에 작은아버지가 차를 대고 가다렸다. 타라. 어디로 갈까? 집으로 갈까? 재덕은 고개를 저었다. 집을 빼고 아무데나 들어가 목욕물에 몸을 담갔 다가 우선 푹 자고 싶었다. 차는 강변도로를 달렸다. 재덕은 창문을 열고 쏟아져 들어오는 강바람을 가슴 가득히 빨아들였다. 운전대를 잡은 작은아 버지는 아무 말이 없었다. 재덕의 눈은 졸음 때문에 자꾸 쌍꺼풀이 졌다. 고개를 몇번 끄덕였을까 재덕이 눈을 번쩍 떠보니 차가 산속으로 난 도로 를 달리고 있었다. 남산으로 접어든 모양이었다. 다시 눈을 스르륵 감았 다. 온몸이 젖은 빨래처럼 흐물흐물 늘어졌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차장 밖 으로 한강물이 얼핏 보이는가 싶더니 바로 샛길로 빠져 시내 쪽으로 접어 들었다. 그 순간 멀미가 날 것 같아서 차를 좀 세워 달랄까 싶었는데 마침 오른쪽에 있는 주차장으로 급히 운전대를 꺾었다. 여기서 내릴까? 외벽 주위를 담쟁이 넝쿨이 빈틈없이 에워싼 육층짜리 호텔이 보였다. 주차장 쪽으로 난 옆문으로 들어간 작은아버지는 지갑에서 신용카드 같은 것을 꺼내 카운터 여직원에게 내밀며 고개를 바짝 들이대고 특정한 방 호 수를 일러주었다. 여직원은 뒤를 한번 돌아다보더니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 였다. 그가 열쇠를 받어들고 올라간 곳은 복도 제일 끝에 있는 육백오호였 다. 생각보다 화려하고 큰방이었다. 목욕부터 할래? 그러나 최루액 때문에 등이 헐어 생기 물집이 아직 완전히 아물지 않아 따가웠기 때문에 욕조에 몸을 담글 수가 없었다. 잠깐 물을 적신 수건으로 찍어내는 게 고작이었다. 그러나 잠은 달랐다. 작은아버지는 샤워를 하는 사이 밖으로 나가고 보이지 않았다. 팬티도 걸치지 않은 채 보드라운 침대 위에 엎드려 엿가락처럼 달라붙어 잠속으로 빠져들었다. 얼마나 잤을까. 눈을 떴을 땐 한간 쪽으로 난 창문에 붉은 노을이 걸려 있었다. 작은아버 지는 창가의 의자에 앉아 양주잔을 기울이다 재덕을 돌아다보았다. 한강 주변이라 습도가 높아서 그런지 아니면 착시 때문인지는 몰라도 둥그렇게 지는 해는 평소보다 절반은 더 커 보였다. 깼구나? 아 예... 평안하게 잘 자더구나. 저 때문에 심려 많이 하셨죠? 재덕은 얇은 시트 자락으로 앞을 가렸다. 속옷 갈아입지. 구십오호면 되겠지. 그리고 말이야. 대충 요새 애들이 잘 입는다는 셔츠하고 면바지도 사왔는데 맞을지 모르겠구나. 작은아버지가 손가락으로 소파 위를 가리켰다. 옷을 갈아입으면서 보니 식사를 주문해놨는지 둥근 덮개가 맞춰진 큰 쟁반 몇 개하고 소스세트 같 은 게 탁자 위에 놓여 있고 푸른 양주병도 눈에 띄었다. 네가 사수디일 줄은 정말 몰랐는걸. 그는 경제통으로 자리를 굳혀서 그런지 공안 부문에 대해건 잘 모르는 것 같았다. 사수대라고 해서 따로 조직이 있는 건 아니구요. 저도 원래는 단순한 통 일선봉대였어요. 하지만 움직일 수 있는 건강한 남학생들은 대부분 사수대 가 될 수밖에 없어요. 여학생도 보호하고... 사진 속의 네 모습은 너무 딴판이야. 몇번이고 눈을 씻고 들여다봤단다. 도대체 무엇이 너를 이렇게 내몰았을까? 사상에 대해서 아니? 작은아버지는 창가 커튼을 치고는 돌아서 다가왔다. 술잔을 채우기 위해 서였다. 재덕은 그에게 자신을 닦달하거나 설득하려 할 의도가 없음을 알 았다. 자신을 무슨 행동을 하고 있는지는 알아야 해. 그리고 그 행동의 동기가 희망이나 열정이라면 그게 암만 어리석은 것이라 해도 좋고... 미흡하지만 분노까지는 이해가 돼. 하지만 절망은 안 돼. 그건 인간성 자체를 파괴하 기 때문에 해악이라고 할 수 있지... 있어. 그는 자신의 잔에 술을 따랐다. 독한 술 향내가 코를 찌르자 재덕은 머 릿속이 잠깐 아찔함을 느꼈다. 네가 쇠파이프와 화염병을 들다니... 나는 거기서 우리 가족사의 우울한 초상을 목격했다. 오욕스러운 것이지. 너도 줄거리는 대충 들어서 알고 있 을 테지. 흥, 유구한 빵집의 역사... 그 집안의 아들들 후후. 작은아버지는 피곤한 표정의 얼굴에 미소를 엷게 입혔다. 자조하는 웃 음이었다. 내 증조할아버지는 아버지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상찬해 마지않는 동학 때의 반란농민군의 한 무리를 이끌어Wrl. 촌구석의 별 볼일 없는 집안에서 난에에 뭔가 출세해보기 위해서는 그런 분탕질의 선두로 나서는 길밖에는 달리 없었겠지. 증조할머닌 까놓고 얘기하면 뭇아전과 사령들의 노리갯감 이 분명했을 관노 출신이다. 게다가 얼금뱅이였으니 서럼움은 더 이상 말 할 나위도 없겠지. 그 혼돈의 전장터에서 사실 상할머니가 증조부의 씨앗 을 진짜로 받았는지도 확실하다고 볼 순 없어. 아버진 오기로 자꾸 우기시 지만. 술 한잔 할래? 재덕은 고개를 끄덕였다. 작은아버지는 냉장고로 다가가 얼음 조각을 꺼 내 잔을 담은 다음 양주를 부어주었다. 그가 평소에 즐겨 마시는 발렌타인 17년산이었다. 재덕은 혀끝을 거티지 않고 한 모금 목구멍 안으로 넘기려 했다. 처음에 숨이 확 막히긴 oT지만 무사리 위장 안으로 흘러들었다. 불 덩이를 삼킨 듯했다. 뇌세포가 천천히 부푸는 느낌이 들었다. 상할머니가 관군이나 일본군의 눈을 피래 간신히 키웠다는 할아버지는 어떻게 사셨는지 아니? 만주에서 일본 관동군에 붙어 그들의 밀정 노릇으 로 근근이 입에 풀칠을 하면서 돌깁군을 때려 잡는 일에 앞장서다가 결국 쥐도 새도 모르게 육이오 때 해병대에 복무한 것만큼은 틀림없는 사실일 거야. 하지만 전투 중 부상을 당한 게 아냐. 보초 근무 중 실족해서 무릎 골절상을 입었다고 하는데 그 일 때문에 당시 약식 군사재판에 회부됐다는 서류가 남아 있어. 고의에 의한 병역의무 기피혐의가 적용됐는데 재판 결 과는 무죄로 나왔고 아버진 소원대로 바로 제대를 했어. 나의 오랜 수사 경험에 비춰볼 때 이 경우는 전쟁공포증에 의한 자해일 가능성이 아주 높 아. 하긴 그건 아무 상관이 없겠지. 아버지는 내가 존경해. 평생 불구가 된 몸을 이끌고 빵을 빚어 남의 속을 채워주는 일에 종사하셨으니. 그리고 너도 알겠지만 우울증으로 요절한 너희 아버지, 내 형님이지. 그 양반이 어떻게 돌아갔는지 넌 아직 잘 듣지 못했을 거야. 하사관으로 군에 입대한 너의 아버지는 '71년 월남전에 참전해서 그 이듬해 캐논 전투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지. 그때 받은 훈장이라는 게 아마 어딘가 찾으면 나올 개다. 그 양반이 원래 예민한 성격이거든. 월남전에서 돌아와 제대한 뒤 그동안 모은 돈으로 벽돌공장을 친구랑 동업으로 차렸는데 실패했지. 사업은 실패 한 대다 형님은 얼마 전에 언론에서도 크게 떠들었지만 고엽제 후유증에 과민하게 반응했단다. 형님은 당시 월남전에 할끼 간 전우가 화학 부대에 있어서 고엽제에 대한 얘기를 약간 들은 적이 있는 데다 과연 귀국하고 얼 마 있다 보니 이따금씩 만나는 옛 동료들이 원인 모를 병을 앓는 대 충격 을 받은 겨야. 암, 충격이었지. 그때 재덕이 네가 태어난 지 기껏 몇 달 채 되지 않았을 게다. 유달리 성홍열 같은 게 심해서 온몸에 발진이나 수 포... 설사가 끊일 날이 없었지. 점차 우울증에 빠진 형님은 그것을 고엽 제의 후유증이 아기한테 유전된 걸로 오해를 하신 거야. 그때부터 형님의 눈에 광기가 비치기 시작했어. 난폭해졌지. 술주정도 심해지고, 술만 마시 면 끝장내겠다고 울부짖었는데... 어디다 숨겨두었던 권총이었는지... 그만 하세요. 제발 좀 그만... 누군가의 손이 자신의 어깨 위에 놓이는 순간 재덕은 움츠렸던 어깨를 폈다. "여기서 뭐 해?" "앉아. 취재 잘 돼냐?" "생각보다는 그럭저럭." "다행이구나. 그리고... 늦었는데 그날 쫓아내지 않고 재워줘서 정말 고 마웠어." "으응... 그럼 오갈 데 없는 애를 내쫓냐 어쩌냐? 마침 쥐어서 보낼 돈 도 없구. 네가 불쑥 풀려나왔다고 찾아와서 나는 이거 꿈인가 생신가 했 어 정말. 근데 어딨다가 그렇게 밤늦게 왔던 거야?" "작은아버지를 만났어." "응" "... " 작은아버지와 투숙한 호텔에서 뛰쳐나온 재덕은 곧바로 현경을 찾아갔었 다. "요즘 더 힘들지? 운동에 회의도 생기고?" "야야, 딴 얘기 하자. 내가 언제 운동했다고 그러냐? 딴 얘기 하자구. 참, 그날 밤 내가정신이 없는 판이었는데도 네 품안에 안기니깐 거 기분 되게 삼삼하데." "뭐야?" "그렇잖아? 그런 경험 처음이었으니." "그런 경험? 얘 좀 봐! 남들이 들으면 무슨 일 난 줄 알겠네. 놀란 새처 럼 파들파들 떠는 걸 불쌍해서 진정시키느라 머리 좀 두 팔로 감싸안아 줬 더니 뭐라고?" "농담이다. 농담! 그러게 딴 얘기 하자고 했잖아." "근데 수업에도 안 들어간다며? 이번 학기는 휴학할 거니?" "글쎄 아직 고민 중이야." "그만 내려가지. 토란국 끓여놨다고 기다리시는 것 같던데." 저녁으로 곁들인 반주가 좀 과한 듯했다. 신풍근 씨는 재덕이 보는 앞에 서 평상바닥을 손바닥으로 두 번이나 탕탕 내리쳤다. "여러분들은 해병대원의 긍지를 갖고 자율 방범 활동에 임해야 해요. 그 게 중요해. 특히 오토바이 타고 다니며 폭주족 행세하는 우리 동네 청소년 들을 보면 경찰과 잘 협조하여 선도할 수 있도록 만반의... " 자율방범대 자문위원과 청소년선도위 위촉위원이라는 직함이 허울은 아 닌 모양이었다. 해병대 출신으로 짜인 자율방범대의 더벅머리 청년 두 사 람이 신풍근 씨 옆에서 한 달에 한 번 펼치는 정기 활동에 앞서서 당부의 말을 들었다. 주걱턱을 한 청년은 반질반질한 군화에다 군복바지를 입고 근육질의 가슴팍이 훤히 드러나는 가죽조끼를 걸치고 있었다. 그는 좀 전 에 빵을 먹으러 왔던 대성철공소의 용접공이기도 했다. "대선배님 절대 걱정 마십쇼. 우리 저 무스탕이 중고긴 하지만 명색이 백어십 씨씨짜리에다, ㄴ에 철가방이나 가스통 따위를 싣고 다니던거 주인 몰래 밤중에 끌고 나와서 설치는 아이들은 걸리기만 하면 우리 밥임다." 물탱크 옆에는 보안등 불빛을 받아 번쩍이는 육중한 오토바이 한 대가 서 있었다. "임자! 여기 자율대가 야식으로 먹을 찐빵하고 왕만두 좀 푸닥지게 싸주 구려!" "아이구, 어련히 알아서 할까요. 여기 밤더위 피해서 주무시려고 나온 사람들도 있고 하니 그만 말씀하기고 안으로 드세요. 어서요." "그래, 하지만 이 나라의 질서는 경찰이 지켜주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판검사들이 지키는 것도 아니라구! 당신들 같은 젊은이가 잘해야 돼!" 신풍근 씨는 재덕과 현경이 겨드랑이를 부축하자 별 저항 없이 일어나면 서 판검사라는 말에 힘을 주었다. 이층 뒤꼍으로 올라와 평상에 걸터앉은 그는 허리춤에서 파이프를 꺼내 담뱄가루를 엄지로 다지며 말했다. "그때 재덕이 네가 그 빵을 못 먹었지... " "저 오늘 빵 원 없이 먹었어요." 파이프 물부리를 입에 문 신풍근 씨가 손사래를 쳤다. "그거말고, 너 그 대학 건물 안에 갇혀 있을 때 말이야. 이 할애비가 얼 마나 가슴이 미어졌겠니? 먹을 것도 마실 것도 다 끊어버렸다는 무지막지 한 소리는 떠돌지 밖에서는 중무장한 병력이 때려잡으려고 잔뚝 독을 품고 기둘리고 있지... 평소엔 잘났다고 떠드는 놈 중에 하나 해결하겠다고 나 서는 화상은 없지... 내가 어떡하면 좋았겠냐 응?" "할아버지 송구스럽습니다. 앞으로 다시는... " "그런 말 듣자는 게 아냐. 들어보라구.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늙은이지 만 한 가지 원칙은 있어. 원칙... 혼찌검을 내더라도 먹여가면서 해야 한 다는 게지. 사람 먹는 것 가지고 우롱하면서 집적거리고 닦달하는 놈들을 보면 그저 한심하다 못해 콱 종주먹을 안기고 싶지. 내가그 옛날 사일구 일어나던 때도 노상 빵집 주인이었지만, 그 빵 때문에 한때 붙들려가 조사 도 메칠 받었지. 거리의 시위대한테 빵을 나눠줬거든, 물하고 이마빡에 김 이 무럭무럭 나며서 뛰는 애덜이 목도 말라하고 허기도 졌길래 데모하는 걸 잘한다고 할 순 없지만 먹고는 해얄 것 아닌감? 사실 부정 선거고 뭐고 간에 난 자유당 정권이 을매나 밀가루 파동을 일으키며 국민들한테 고통을 줬는지 그게 미웠지." "예에... " 물끄러미 앉아 있던 현경이 수첩 갈피를 열고 부지런히 받아적기 시작했 다. "오일륙 혁명 나던 때는 또 시청 광장에 진주한 군인들한테 빵을 쪄 날 랐지. 겪어보니 민주당 정권도 부패했더라 이거야. 허구한 날 썩은 밀가루 만 풀고 말이지. 근데 이번엔 그러잖아도 손자인 네놈이 그 사지에 기어들 어가 있는데 내가 가만히 있을 수 있겠니? 그래서 오전부터 할망구를 닦달 해서 빵을 세 찜통이나 쪄서 한 쉰댓 개 비닐에 잘 포장해서 생전 안 메던 등산 가방에 넣고는 마침 비번으로 놀고 있는 그 개인택시 하는 전라도 김 씨 있다구. 그이 차를 만 원에 세를 내서 그 대학으로 가자고 했지. 오 개 사단이 깔려도 뚫고 지나갈 길을 알만큼 서울 지리에 빠꼼하다는 김씨도 이 골목 저 골목을 쑤시고 다니더니 혀를 내두르더라고. 자기가 광주사태 때도 귀신처럼 시내를 쑤시고 다녔다고 한 사람인데 병력들이 워낙 개미처 럼 좌악 깔려서 막아대는 데는 두 손 들지 않을 수 없다는구먼. 그래서 돌 려보냈어. 오천 원 더 보태서. 그리고는 천연덕스럽게 등산 가는 늙은이라 고 둘러대며 막무가내로 들어가려 해도 안 돼. 외국인도 막 검문을 해서 닭장차에 실려 보내는 걸 보고는 그만 포기했어. 공기는 메케하고 날은 푹 푹 찌고 그랬지. 하지만 저 안에서 굶고 있는 손자놈한테 이걸 먹여야 하 는데 하는 마음으로 그 무거운 배낭을 지고도 서너 시간 동안 다리를 쉬지 않았어." "할아버지 냉수 드시고 말씀하세요." "으, 으응... 커 시원하고. 아, 그래서 어떡하누? 이 더운 날에는 빵이 오래가질 못하거든. 앙꼬도 쉬이 상하고 비닐 안이니까 빵도 다 물크러질 텐데 말이야. 애가 타서 입술은 바짝바짝 마르지. 이건 하늘이 두 쪽이 나 도 내 손주한테 먹이긴 글렀구나 싶어서 어느 주택가 골목 목련나무 그늘 에 털썩 맥이 풀려 주저앉아서 쉰다는 게 그만 전경애들 일개 소대 옆이 되고 말더구먼. 근데 보니 그 젊은이들도 고생 많이 하데. 하이바를 벗으 니깐 안경 쓴 앳된 젊은이들뿐이야. 지들끼리 점심때가 훨씬 지났는데 식 사 추진이 안 된다며 돈 거둬서 빵하고 음료수나 사서 때우자고 한숨을 푹 푹 쉬는 소릴 들었어. 그 소리를 듣는 순간 나도 모르게 배낭 끈을 풀었 어. 그리곤 빵 봉다리들을 하나하나 꺼냈다구. 보니 아직은 먹을 만하 고... 무전기를 들고 있는 고참인 듯한 젊은이를 손짓으로 불렀어. 그 친 구 눈이 휘둥그래지더구만. 몇번이나 고개를 굽실거리며 할아버지 고맙다 고 인사를 하고... 재덕이 네 또래만한 젊은이들이 빵을 허겁지겁 먹으며 허기를 끄는 모습을 보니 그래도 빵을 쓰레기로 버리지 않아 다행이구나 싶으면서도 왜 그렇게 눈물이 나오는지... 너랑 맞설지도 모르는 젊은이한 테 기껏 너를 주려고 갖고 갔던 빵을 먹이고는 그 꾸여구역 먹는 전경들 모습을 보니깐 맴이 이상해. 그래도 지금 생각해도 그것 하나는 잘한 일 같아. 내가 취했니 재덕아?" "할아버지 안 췌셨어요." "아냐, 난 취했어. 말을 막 한는 걸 보니." "아니라니까요... " 재덕은 눈시울이 붉어졌다. " 그 빵은 이미 제가 먹은 거나 다름없어요 할아버지." "왜? 어째서?" "할아버지가 그렇게 인덕을 쌓으셨으니까 제가 그 와중에서도 크게 다친 데 없이 또 일찍 풀려나왔잖아요? 전 그렇게 믿어요." "그렇게 생각해주니 고맙다, 고마워." 신풍근 씨는 재덕의 목덜미에 손을 휘감고 앞으로 잡아당겨 이마끼리 맞 대었다. 열시 반. 어느덧 마을버스의 막차 시간이었다. "그냥 쉬세요. 할아버지." 신풍근 씨는 부득부득 배웅을 하겠다고 나섰다. 네 사람은 마을버스에 시동이 걸리길 기다리며 나란히 서서 잔모래 같은 불빛으로 가득찬 세상을 바라다보았다. "재덕아!" "예." "재덕아!" "예, 할아저비!" "저 불빛들 보이지?" "예." "저 불빛들이 이렇게 멀리서 보면 가물가물한 게 불면 곧 꺼질 것 같지 만 그 둘레에 서너 명의 식구들이 곤한 몸으로 모여앉아 힘겹게 빚어내는 것이라는 생각 안 해봤니? 저 혼자 고립된 불ㅂ들이란 세상에 하나도 없단 다. 있을 수가 없어요." "그럼 불빛과 불빛 사이는 모두 길이겠네요 할아버지." "응? 그렇지 허허. 이럴 땐 호랭이가 물어갈 만큼 영특도 허지. 아무렴 끊어진 길이란 없지, 없어." 재덕은 할아버지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어렴풋이 이해가 될 듯도 하였 다. 부르릉 부릉부릉. "탈 거면 빨리 타슈. 나도 빨리 한바퀴 돌고 집에 들어가야 하니깐." 마을버스 운전기사가 차창을 열고 소리쳤다. "아, 예 갑니다. 할아버지 또 찾아뵐게요." "할아버지 고맙습니다. 할머님도요." "자주 올 필요 없다니까. 너희들 길이나 열심히 가!" 차문을 닫은 마을버스는 곧바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손을 흔들던 재덕은 신풍근 배커리 간판을 한번 더 뵈두기 위해 고개를 차창 밖으로 길게 빼 늘렸다. 해설 : 우찬제 김소진은 결코 길지 않은 기간 동안 소설을 쓰다가 소설처럼 우리 겉을 떠난 작가이다. 1991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쥐잡기]가 당선된 이래 만 육 년 동안 단편34편, 장편2편 등의 소설을 남겼다. 그의 소설에 대해 나 는 다른 자리에서 <아비의 역정>과 <어미의 언어>를 결합시켜 자기 나름의 독특한 세계를 이룬 형상이라고 적은 바 있다. 아비의 역정이란 이 땅의 초라한 민초들의 실존적 궤적을 일컬음이며, 어미의 언어란 민족의 심상과 생명의 숨결을 지닌 대지의 말을 의미한다. 신이 인간의 대지에서 숨어버린 지 이미 오래되었고, 더불어 인간적 영 웅의 행적 또한 사라진 것처럼 보이는 범속하고 비속한 산문시대를 성찰하 고 그것을 소설화한 작가의 한 사람으로 우리는 김소진을 떠올린다. 그는 역사와 현실을 조망하되, 정치경제적 시선을 넘어서 실존적인 응시의 넓이 와 깊이를 아우르고자 한 작가에 속한다. 범속한, 때때로 범속하다 못해 구질구질하기까지 한 아비와 어미의 이야기에서 출발한 김소진의 이야기가 미아리 사람들의 이야기로 확산된 것은 그런 연유일 것이다. 연작 장편 [장석조네 사람들]을 비롯 [신풍근 배커리 약사], [눈사람 속의 검은 항아 리] 등으로 이어지는 창작 경로에서, 그는 자신의 문학세계의 한 특징을 분명히 했다. [신풍근 배커리 약사]는 한마다로 포괄의 소설이다. 끊어진 길, 단절된 역사, 이어지지 않는 인간의 숨결 등을 힘겹게나마 이어보고자 한 상상력 과 언어로 빚어진 작품이다. 그리고 역사의 이름으로 예찬되거나 가족사의 미명으로 옹호되는 온갖 거짓 표상들에 항의하는 반성적 인식 기제를 함축 하고 있어, 결코 범상치 않은 이야기 지평으로 독자들을 안내한다. 한총련이 주최한 8.15 통일축전 기간 중 벌어진 연세대사태에 가담했다 가 풀려난 운동권 학생 재덕은 여지친구 현경과 더불어 할아버지의 빵집으 로 간다. 학보사 기자인 현경이 <민초에게 듣는 이야기>란 기획 시리즈의 일환으로 할아버지를 취재 대상으로 정했기 때문이다. [평범하면서도 거친 삶을 꿋꿋이 살아온 어른들한테 녹음기를 들이대고 살아온 내력에 대한 이 야기를 구술받은 다음 맞춤법만 조금 손봐서 싣겠다는]게 현경의 의도였 다. 이 대목은 김소진 소설의 창작 방법과 관련하여 주목된다. [맞춤법만 조금 손봐서]를 <작가적 인식에 의한 소설적 형상화 과정을 겨쳐서>라고 고치면 곧 김소진의 소설 창작 방법과 일치하는 까닭이다. 할아버지 신풍근 씨의 빵집에 가서 그들은 사십오 년에 걸친 빵집 역사 의 애환은 물론 그 가족사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다. 해병대 출신인 할아버 지의 6.25참전 이야기하며, 동학 때 전설적인 장군이었다는 재덕의 고조부 장태장군 이야기와 쇠가죽솥을 개발하여 음식을 끓이고 또 빵의 일종인 마 마병을 만들어 군사들에게 제공했다는 고조모의 이야기, 그리고 <유구한 빵집의 역사>는 거기서부터 시작된다는 이야기 등등... 아울러 재덕이 연 세대에서 굶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빵을 배낭에 잔뜩 넣고 갔지만 들어갈 수 없어 손자에게 먹이지 못한 빵을 손자와 대치하고 있던 전경들에게 먹 이고 왔다는 이야기도 구술된다. 이같은 할어버지의 이야기는 크게 세 가지 의미망을 지닌다. 신풍근 배 커리의 역사와 관련된 애환의 이야기는 그대로 끊어질 듯이 이어진 민중의 생활사라는 제 1의 의미망을, 가족사와 관련된 이야기는 고난받는 민중들 이 과거 알리바이 내지 신비화로 현실의 보상을 받고자하는 경향과 연루된 제2의 의미망을, 손자 대신 전경에게 빵을 먹이고 온 사연의 이야기는 넉 넉한 대지적 품성과 커다란 생명의 에너지로 타인에 대한 진정한 연민의 정조를 발하는 민초들의 기본 정서와 관련된 제3의 의미망을 지닌다는 것 이다. 녹음기를 갖다댄 기자 현경은 이런 이야기를 그대로 기록할 것이다. 그 러나 작가인 김소진은 그 이야기들을 교란 시킨다. 현직 검사인 재덕의 작 은아버지와 재덕의 만남 장면을 통해 작가는 특히 할아버지의 두 번째 이 야기를 뒤집는다. 자랑스런 가족사를 <가족의 우울한 초상>으로 역전시키 는 것이다. 촌구석에거 별 볼일 없던 고조부는 난세에 출세해보겠다고 분 탕질한 것에 다름아니며, 고조모는 관노 출신에 얼금뱅이였을 따름이고, 할아버지의 상처는 6.25전쟁 중 부상을 당한 것이 아니라 전쟁공포증으로 인한 자해의 결과이며, 아버지 또한 월남전 후유증으로 광기에 시달리다 못해 자살하고 말았다는 작은 아버지의 이야기로 과거사에 대한 알리바이 를 벗기며 탈신비화를 단행한다. 이런 탈신비화 전략은 또한 재덕 세대의 사회 변혁 논리에도 암암리에 적용된다. 이같은 가족사에 대한 반성적 성 찰의 일환인 탈신비화 담론, 혹은 전통에 대한 반역을 도모하면서 새로운 에너지를 얻고자 하는 의도, 바로 여기에 이 소설의 순금 부분이 들어 있 다. 역사도, 가족사도, 현실도, 현실 변혁도 뭔가 끊어져 있는 것이 아닌가 작가는 의심하는 것 같다. 사정이 이러한즉 어찌 전면적 진실을 쉽게 말할 수 있겠는가. 김소진이 생전에 쉼없이 부분적 진실을 미시적으로 탐색했던 것도 그런 연유일 터이다. 그러면서도 전면적 진실의 세계를 끊임없이 캐 묻는 작가의 역설적 질문의 방식을 그는 줄곧 보여주었다. 이 소설에서 할 아버지의 이야기와 작은아버지의 이야기를 대조시키면 전면적 진실이 훼손 된 현실을 증거하는 하나의 패러다임과 [아무렴 끊어진 길이란 없지, 없 어]라는 민초 할아버지의 전경화된 신념을 다른 패러다임으로 병치시켜 놓 은 것이 그 구체적인 예가 된다. 끊어진 듯 보이는 길을 잇고, 이으면서 또한 반성의 거울로 끊어놓은 역설적 시도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냉장 고 지은이 : 김현영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카트린만도 못한 놈인 것 같다. 오늘 아침 식탁에서도 그녀는 바게트빵의 속을 뜯어내고 있었다. 빵의 속살을 뜯는 그녀의 손놀림은 늘 최고의 운만을 점찍는 주사위를 던지듯 경쾌했다. 길이가 50센티는 되어 보이는 바게트의 뾰족한 끝을 잘라내고서 뜯어낸 속은 우묵한 그릇으로 떨어지고 있었고, 바게트와 그릇 사이에선 와인빛 매니큐어를 칠한 그녀의 뾰족한 손톱이 비행하고 있었다. 바게트의 본체에서 이탈한 빵조각들이 부스러기 하나 흘리지 않고 정확히 그릇에 담 겨지는 것이 나는 불만스러웠다. 그것은 그녀의, 다른 여자가 아닌 바로 그녀의 손톱이라는 와인색 비행기에 실려 막 생애 최고의 비행을 하고 있 는 빵조각들에 대한 적의였다. 이제 그릇에 안전하게 착륙한 저 빵조각들 은 황홀했던 비행을 다시금 떠올리며 곧 포근한 화상과도 같은 우유에 젖 어들 테지.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우유에 적신 한 접시의 빵은 언제나 카 트린의 것이었다. 카트린은 치와와다. 치와와는 애완견의 일종이고 애완견 은 말 그대로 애완용 개를 가리킨다. 복잡하게 말할 것도 없이, 그러니깐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 하면, 한마디로 키트린은 개다, 라는 것이다. 나는 카트린만도 못한 놈이다. 즉 나는 개만도 못한 놈이다. 그녀는 녀석, 아니 년의 둥그런 눈동자와 기타줄처럼 가느다란 늑골이 드러난 마른 몸집을 볼 때면 애처로운 아기 사슴을 보는 것만 같다며 아름 다운 눈에 금방 눈물방울을 만들어 달곤 했다. 내게는 녀석 아니 년의 애 처로움이 내숭으로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의 진주 같은 눈물방울을 안 경인 양 쓰고 보면 카트린의 내숭이 바로 내숭이라는 이유로 애처로워 보 이기도 했다. 왜 마음에는 늑골이 없는 걸까? 기타줄이 다 뭐야. 거미줄보 다 더 가는 늑골이 휑 드러난 내 마음을 그녀가 볼 수 있다면 그녀는 기꺼 이 나를 위해 주사위를 던져 한 접시의 아침식사를 준비할 것이었다. 그러 나 그녀가 나에 대해 연민을 갖기에 나는 너무 강했다. 그녀의 주사위가 아무리 최고의 운만을 점찍는다 해도 나와는 무관한 일이었다. 그녁녀가 내게 줄 수 있는 건 오직 <꽝>뿐인 것을. 그녀는 연약한 것들을 사랑하는 아름다운 여자이다. 그런 그녀 앞에서 강하다는 건 확실히 개만도 못한 일 이었다. 카트린의 밥을 만들고 나서 그녀는 바게트의 껍데기를 조금씩 뜯 어먹고 카페오레를 한 모금씩 마시기를 반복했다. 그녀는 유리로 만든 여 왕처럼 조심스러우면서도 품위 있고 자비로워 보인다. 금방 구워서 속이 촉촉하고 부드러운 바케트일수록 껍데기도 더 맛있어. 바게트의 껍데기를 뜯으며 그녀는 늘 이렇게 말했다. 파출부 아줌마가 아침에 우리집으로 출근하면서 사들고 오는 갓 구운 바게트와 카페오레 한 잔이 그녀의 아침식사였다. 입이 짧은 그녀에게 50센티짜리 바게트는 너무 길었다. 좀 작고 둥그스름한 바게트도 있었지만 그녀는 바게트는 길어야 매력이 있는 것이라고 옳은 소리를 했다. 길어서 매력적인 바게트는 그러 나 삼분의 일 정도만 그녀의 입에 들어가는 행운을 누릴 수 있었다. 그것 도 껍데기만. 게다가 매일 그날 구운 바게트만을 상대하기 때문에 져녁나 절이 되면 속은 속대로 껍데기는 껍데기데로 뜯긴 채 남은 바게트는 버림 받은 시체처럼 단단하게 굳어 있곤 했다. 이놈의 빵을 무슨 맛으로 먹는지 모르겠네. 팥이들었나 쨈이 들었나 빠 다가 발라지길 했나. 것두 껍데기만 먹으니 그게 무슨 심보람. 돈 좀 있다 고 유세하는 건지 뭔지... 파출부 아줌마는 굳은 바게트를 쓰레기통에 처넣으며 이렇게 중얼거겼 다. 그런 아줌마를 보고 있으면 나는 전세계 바게트에다 단팥을 듬뿍 집어 넣고 싶은 심정이었다. 바게트에 단팥이 들어 있다면 아줌마는 남은 바게 트를 쓰레기통에 처넣는 대신 아마 자기가 먹겠지. 단팥이 든 바게튼는 상 상만으로도 너무 우스웠다. 그러나 그걸 먹는 아줌마를 생각하면 우습다기 보다는 조금 슬픈 기분이었다. 나는 아줌마를 위해 바게트에 단팥을 넣고 싶다던 생각을, 역시 아줌마를 위해 금방 뒤집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가 끔 남은 바게트를 아줌마가 쓰레기통에 처넣기 전에 몰래 내 방으로 가져 가기도 했다. 속을 조금 파서 사타구니에다 대고 거울을 보고 있으면 기분 이 야릇했다. 바게트는 긴 게 매력적이야. 바게트에 찍힌 그녀의 손톱 자 국은 내게 그렇게 속삭였다. 나는 이어서 내 물건이 바게트만하게 자랐으 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전력 질주를 해도 그녀에게 다가갈 수 없을 정도로 넓은 운돈장 같은 식 탁을 사이에 두고 나와 마주앉은 그녀는 조간 신문을 읽으며 아침식사를 하고 있다. 가끔씩 머리를 쓰다듬으며. 카트린은 식탁 위로 올라가서 우유 에 적신 바게트의 속살을 핥아댄다. 내가 저렇게 식탁위에 앉아 있으면 그 녀는 머리도 쓰다듬어줄까? 카트린 같은 개만 울라갈 수 있는 식탁, 개들 의 운동장, 그곳에서 식사를 하고 있는 내 마음은 한마디로 개 같았다. 나 는 의자 등받이에 깊이 파묻었던 상체를 앞으로 조금 구부렸다. 하리를 펴 고 앉아도 등받이는 머리보다 20센티마터 더 높았다. 이런 의자에서는 식 사를 하는게 아니다. 차라리 잠을 자는 게 낫지. 점점 서선을 식탁밑으로 떨구자 식탁 밑에 깔린 두툼한 러그 위로 그녀 의 하얀 발이 보였다. 어느 틈에 슬리퍼에서 빠져나온 맨발은 핥고 싶을 정도로 깨끗했다. 그리고 그 발과 다리를 잇고 있는 한 뼘도 안 되는 발 목, 살망한 종아리, 또 그위로 계속 올라가면,,, 보지 않아도 다 보인다. 백자처럼 희고 투명하고, 매끄럽고, 차가운, 그녀. 아침 식탁에 그녀는 성장을 하고 앉는 일이 없었다. 나이트 가운을 그대 로 걸치고, 빗질 안 한 머리를 대강 틀어올리고, 심지어 세수조차 안 하고 있는데도 그녀는 백제의 보물처럼 우아했다. 그런 그녀를 직시하다가는 눈 이 멀어버릴 것 같았다. 나는 내 눈을 찌르는 심정으로 급하게 이오폰을 귀에 꽂았다. ...살인자는 새벽 동이 트기 전에 깨어나 신발을 신었다. 고 대 화랑으로부터 얼굴을 내밀고 걸어 내려가 문에 다가섰다. 그리고 안을 보았다... 아버지, 난 당신을 죽이고 싶어. 어머니, 난 당신을 밤새 사랑 하고 싶어, 그건 가슴 시리도록 당신을 자유롭게 하지, 그러나 당신은 결 코 나를 따르지 않을 거야, 짐 모리슨이 짐승처럼 부르짖었다. 귀에 이어폰을 꽂고 있으면 나는 내가 듣고 싶지 않은 소리는 듣지 않아 도 되었다. 그리고 아무 말도, 아무 생각도 필요 없었다. 가수들이 내 대 신 생각하고, 내가 하고 싶은 말도 언제나 나보다 먼저 하고 있었으니까, 더구나 내 생각들에는 도대체가 창의적인 것이라곤 없었다. 가수들이 노래 를 하고, 그 노래를 내 귀가 접수하고, 그러다 보니 어느 날 그 노래들은 내가 생각한 것처럼 되어버렸다. 내 생각이 없기 때문에, 내 귀는 아직은 어떤 노래에 대해서든 순수한 편이었다. 그러므로 내 눈을 찌르는 심정으 로 이어폰을 꽂게 되더라도 나는 특별히 저항감을 느끼거나 하지는 않았 다. 아침 식탁엔 언제나 그녀와 나, 둘뿐이었다. 기능성 음료 사업을 하는 아버지느 늘 우리보다 먼저 아침을 먹고 나가기 때문이었다. 철분 음료, 식이섬유 음료, 칼슘 음료... 이름만 들어서는 아버지가 만드는 음료들을 몽땅 장복한다면 건강에 대한 걱정은 붙들어매도 좋을 정도로 그럴듯해 보 였다. 그러나 이 음료들의 맛은 기존에 있던 모모 음료수들, 혹은 드링크 제와 성분도 맛도 똑같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이 음료들에서 참신한 점이 있다면 그것은 새로운 이름과 새로운 포장뿐이었다. 아버지가 처음에 시작했던 건 정력 보강 음료였다. 그게 생각 외로 히트를 치자 그 다음부 터는 이미 나온 음료를 비슷하게 베끼기 시작했다. 나는 아버지가 사업가 로서 능력이 있어서 성공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어쩌다 운 좋게 공부 잘하는 눔 옆에 앉게 되어 커닝을 성공적으로 했을 뿐이다. 그러나 아버지 는 커닝을 잘하는 것도 뛰어난 사업 수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한 아버지의 자부심을 풀무질하여 커닝 사업은 하루가 다르게 번창했다. 하루 에 한 번이나마 아버지 얼굴을 볼 수 있었던 시절이 이젠 고생대의 기억처 럼 까마득할 지경이니. 커닝을 했건 안 했건, 나는 아버지가 안쓰러울 때 도 있었다. 가장이라는 게 뭔지, 이렇게 아름다운 그녀를 아침 식탁에 앉 은 나한테 통째로 내던지고 기능성 음료 따위에나 풍덩빠져 있어야 하는 아버지가. 그녀가 아름다운 외모를 지닌 건 사실이지만 나를 대하는 그녀의 태도까 지도 아름답다고 할 수는 없었다. 지금도 나 같은 건 안중에도 없고 그저 카트린의 머리만 쓰다듬고 있으니 말이다. 그나마 잔소리라도 하지 않는 걸 고마워해야 하는지도 모르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녀는 내 아침식 사 습관이 맘에 들지 않아 아침마다 잔소리를 해댔었다. 그놈의 꽁치구이를 꼭 먹어야겠니? 생선이 그렇게 좋으면 더 맛있는 연 어 스테이크를 먹어도 되잖니. 아줌마한테 말하면 금방 해줄 텐데 굳이 네 가 아침부터 냄새를 피우는 이유가 뭐니? 그 뒤에도 이어서 뭐라뭐라 쫑알대며 그녀의 귀여운 입은 계속 열려 있 었지만 나는 딱 여기까지밖에 듣지 못했다. 내 귀는 이어폰으로 막혀 있었 고 섹스 피스톨즈의 펑크 음악이 그녀의 잔소리들과 내 귀사이에 바리케리 드를 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불평대로, 내가 손수 구운 소금에 절인 꽁치구이가 나의 아침식 사였다. 나는오늘도 꽁치구이 한 점에 맹물 한 모금을 마시고 있고, 그녀 는 바개트의 껍데기와 카페오레를 먹으며, 우스꽝스럽게 서로 마주얹아 있 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그녀는 잔소리를 하지 않는다. 잔소리를 하지 않는 그녀의 입은 쫑알대며 열려 있을 때처럼 귀엽지는 않지만 너무 섹시하다. 식사를 다 마쳤는지 그녀는 벗겨진 슬리퍼를 다시 발에 꿰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 뒤를 카트린이 쫄랑쫄랑 따라갔다. 카트린이 그녀의 하얀 발 뒤꿈치를 핥자 그년는 가볍게 카트린을 안아올렸다. 카트린 팔자가 정말 상팔자다. 그녀의 흰 가슴팍에 온몸을 묻을 수 있는 카트린. 그녀의 둣모습을 멍청이처럼 보고 있다가 그녀가 자기 방으로 들어간 걸 확인하자마자 나는 내 앞에 놓인, 반쯤 파먹은 꽁치구이를 즉각 쓰레기통 에 쏟아버렸다. 그러나 내일 아침엑도 꽁치를 구워서 그녀 앞에서 보란 듯 이 먹으리란 것을 나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녀를 향해선지 나를 향해 선지 알 수 없는 반감에 휩싸여 나는 냉동실에서 배스킨라빈스 아이스크림 을 꺼내 통째로 퍼먹기 시작했다. 초콜릿무스, 민트칩, 아몬드봉봉... 닥 치는 대로 처넣은 아이스크림이 입 안에서 마구 섞이는 바람에 도무지 무 슨 맛인지 알 수 ㄹ었다. 그래고 여전히 입에서는 꽁치 냄새가 나는 것 같 았다. 오늘은 배스킨라빈스 아이스크림을 좋아하는 서연이 생일이었다. 그 애를 만나기 전에 꽁치 냄새를 지워야 하는데. 나는 아이스크림을 더욱 왕 창왕창 퍼먹었다. 그런 나를 파출부 아줌마는 겁이 난 눈초리로 쳐다보았 다. 가엾은 아줌마, 그녀가 먹는 바게트를 그녀처럼 머고 싶겠지. 던킨 도 넛을 우유에적셔 먹는 그녀처럼. 벨기에산 비스킷을 블랙 커피와 함께 먹 는 그녀처럼, 모든 것을 그녀처럼,,, 서연이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아줌 마에게 단팥빵, 곰보빵, 그런 촌스런 이름을 가진 빵들을 잔뜩 사와야지. 나는 식당의 한구석, 아니 구석이라 하기엔 너무 넓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 는 우리 집 냉장고를 노려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냉장고는 700리터짜리로 초대형이었다. 500리터짜리도 충분히 컸지만 그 녀는 700리터짜리를 고집했다. 잘 꾸며진 정원처럼 냉장고 안에 예쁜 음식 과 재료들을 보기 좋게 넣어두고 싶다고 했다. 그녀의 외모 만큼이나 아름 다은 발상이었다. 그러나 내게 냉장고는 너무 컸다. "쥐라기 공원"이란 영 화를 본 이후로 냉장고를 볼 때마다 나는 거대한 공룡을 떠올렸다. 덩치가 공룡만한 냉장고에는 포만한 공룡의 뱃속처럼 언제나 음식이 그득했다. 스 테이크용으로 알맞게 썰린 육고기와 물고기, 생크림 케이크, 와인, 키위, 토마토, 맬론, 햄, 치즈, 베이컨, 버터, 래디시, 파슬리, 마요네즈, 푸딩, 타르타르 소스, 양상추, 레몬, 우유... 그런데도 변명을 하지만 나는 아줌 마가 우리 집 냉장고에 들어 있는 음식을 두려워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물 론, 밥도 없고 김치도 없다는 아줌마의 말은 사실이었다. 아버지는 주로 밖에서 식사를 하고, 그녀는 카나리아처럼 빵조각이나 과일을 조금 먹을 뿐이고, 카트린 역시 그녀를 닮아 그녀처럼 조금씩만 품위 있게 먹었다. 나? 나는 개만도 못한 놈이니까 이 집에선 사람이라기보단 폐기 처분할 낡 은 가구에 불과했다. 그런 나를 위해서 내뜻대로 식탁을 차렸다간 나는 엄 마처럼 굶어죽을지도 몰랐다. 나는 살기 위해 밥 따위는 먹지 않았다. 밥 도 없고 김치도 없어서라고 변명하는 아줌마를 나는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저녁마다 꽁치를 사와서 아침마다 그걸 먹는 것도 어쩌면 마찬가지 일테니까. 아줌마 두려워하는 것까진 아니지만 나는 냉장고에 들어 있는 음식을 보면 비위가 상했다. 그녀의 바람대로 냉장고는 잘 가꿔진 어느 정 원 못지않게 화려했지만 내게는 냉장고에 든 음식이 마치 공룡의 배설물처 럼 느껴질 뿐이었다. 아버지는 저 공료을 굶겨죽이지 않기 위해 아름다운 그녀를 볼 시간도 없이 일한다! 그런 생각을 하면 안쓰러운 아버지가 더더욱 안쓰러워지곤 했다. 그런 식으로 따지고 보면, 아줌마가 하는 일이란 것도 공룡의 배가 조금이라도 비지 않게 꽉꽉 채워주고 변비에 걸리지 않도록 유통 기간이 지난 식품을 제때에 배변시키는 것에 불과한 것어었다. 그녀에게는 파출부 아줌마가 정원사나 실내장식가일지 몰라도 내 관점에서는 똥 치기와 다를 바 없었다. 똥 치기 파출마 아줌마, 때로는 똥 치는 일에 정말 진력이 나 기도 하겠지, 나는 진심으로 아줌마를 동정했다. 먹을 건 하나도 없구만, 죄다 버릴라고 이렇게 꽉꽉 채워둔담. 냉장고에 든 음식이 꼭 먹기 위해서가 아니라 장식을 하기 위해서도 존 재한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 아줌마는 가끔 불평을 터뜨리곤 했다. 아 줌마의 불평대로 음식의 가짓수는 많았지만 내가 찾는 그 하나는 언제나 냉장고에 없었다. 냉장고에는 쓸데없이 음식이 채워졌고 또 쓸데없이 버려 졌다. 한때는 냉장고에 내가 찾는 것들로만 가득 차있던 적도 있었다. 그 러나 그때는 내가 그걸 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었다. 그래서 또 쓸데없 이 버려졌었다. 내가 아침마다 기를 쓰고 꽁치를 먹는 건 꽁치가 바로 내 가 찾는 그 하나라서가 아니었다. 내가 원하는 건 꽁치구이를 닮은 어떤 것이었다. 그러나 꽁치도 없는 냉장고에 내가 찾는 그것이 있을 리가 없었 다. 나는 아침마다 바게트 껍데기를 뜯어먹는 그녀 앞에서 절망적인 심정 이 되어 꽁치를 발라먹고 있는 것이었다. 아이스크림 한 통을 다 비우고 거실로 나오보니 그녀는 어느새 해지 남 방에 청바지 차림을 하고 머리에 묶은 녹색 스카프를 팔락이며 2층에 있는 그녀의 아틀리에로 올라가고 있었다. 그렇게 입은 그녀의 모습은 서연이보 다도 더 어린 말괄량이 소녀처럼 보였다. 그 애 누구야? 야구 모자 쓰고 너랑 같이 엄청나게 큰 캔버스 들고 가던 애 말야. 그녀는 화가였다. 언젠가 캔버스 사러 그녀와 함께 외출한 일이 있었는 데 같이 돌아 다니니는 것을 서연이가 보고는 앙살을 부려댔다. 닉스 청바 지를 입고 야구 모자를 쓴 그녀는 서연이가 아니라 누가 보더라도 귀여운 여자애의 모습이었다. 그날 나는 그녀의 남자친구가 된 기분으로 함께 돌 아다녔다. 같이 물건도 사고, 밥도 먹고. 그렇다. 그녀와 나는 밥을 함께 먹었다. 비록 김밥이긴 했지만 나는 그녀가 밥도 먹는다는 사실에 조금 충격을 받었었다. 나는 엄마가 먹던 음식을 그녀도 먹을 수 있다고는 상상 해보지 않았었다. 사진 찍기 좋은 음식은 맛이 없는 법이야. 엄마는 화려한 김밥을 졸라대는 내게 자신이 어려서 맛보았던, 노란 단 무지 하나가 덜렁 들어 있던 김밥이 얼마나 맛있었나 얘기하고는 그 말 끝 에 이렇게 덧붙였었다. 암미의 말에는 나도 동감했다. 김밥맛은 사실 단무 지 맛이니까. 그래도 보기 좋은 떡이 더 맛있다잖아요. 그게 입으로 먹는 거냐? 눈을 먹는 거지. 엄마의 말에 동감하면서도 나는 이미 눈으로 먹는 것에 더 익숙해져 있 었다. 눈으로 먹는 데 익숙한 그녀와 나는 치즈 김밥은 한 다발의 꽃처럼 예뻤다. 노란 물을 들이지 않은 단무지는 치즈. 달걀. 오리. 게맛살. 햄. 우엉. 당근 등에 가려져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이제 단무지는 자신의 노란 물을 밥 전체에 물들여가며 김밥의 중심에 있을 필요가 없었다. 비록 명태살로 만들었을지라도 꽃게처럼 화려란 색쌀을 가진 게맛살이 더 중요 한 재료였다. 치즈 김밥. 참치 김밥. 환상 김밥. 쇠고기 김밥. 누드 김밥. 오징어 김밥... 김밥 이름이 무슨 이벤트 프로그램처럼 적혀 있는 김밥집 이라면 더더욱 그랬다. 그녀가 김밥을 먹을 수도 있다는 사실에 조금 놀라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엄마처럼 촌스러워 보인 건 아니었다. 노란 수선화 같은 치즈 감밥을 먹는 그녀는 오히려 위여웠다. 왜냐면 그것은 그녀의 이밴트였을 뿐이니까. 누구냐구? 대답해보라니까. 서연이의 앙살이 단순한 앙살로서의 수위를 넘자 나는 서연이의 오해를 풀어주어야만 했다. 내가 아무리 그녀의 남자친구가 된 기분으로 돌아다녔 다 해도 그녀는 나의 여자친구가 아니었으니 말이다. 우리 엄마야. 대답을 해놓고 나는 괜히 화가 났다. 나는 한 번도 그녀를 엄마라고 불 러보지 낳았는데 서연이의 오해를 풀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그 말을 썼던 것이었다. 그녀는 나의 엄마였다. 호적에도 적혀있는. 어머어머, 정말? 정말이야? 좋겠다. 멋쟁이 엄마를 둬서. 네가 왜 이렇 게 깔끔하고 세련됐나 했더니 다 엄마 덕분이었구나. 서연이는 오래도록 못 만난 자기 엄마를 만기라도 한 것처럼 호들갑을 떨었다. 내가 좀 세련된 건 사실이지만 그런 그녀 덕분이 아니었다. 나를 이렇게 키운 것은 나의 진짜 엄마였다. 엄마는 4년 전, 내가 고등학교에 입학할 무렵 급체로 세상을 떠났다. 푸 르딩딩한 입숩 사이로 고구마가 삐져나온 엄마의 시체는 너무 희극적이어 서 똑바로 볼 수조차 없었다. 코미디가 죽음과 만나면 참혹하다는 것을 나 는 그때 처음 알았다. <급체>라는 단어를 온몸으로 표현하고 죽었는데도 나는 엄마가 굶어죽었다고 생각했다. 매일 잠시도 쉬지 않고 무엇인가 끊 임없이 먹어대던 엄마의 모습을 아직도 선명히 기억하지만, 엄마는 아무것 도 먹지 못해 굶어죽은 것만 같았다. 그때 꽁치라도 한 마리 구워서 같이 같이 먹었더라면 엄마는 굶어죽지 않았을 텐데. 나는 터무니없이 이런 후 회까지 했다. "오늘은 학원 안 가니?" 붓을 든 채로 2층에서 내려오며 그녀가 물었다. 토마토주스라도 마실 모 양인가모았다. 그녀는 작업을 시작하기 전에 늘 과일이든 야채든 생으로 갈아 마셨다. "오늘은 일요일이예요." 나는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내 매력이 발산되지 않도록 한껏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내가 그녀에게 관심을 갖는 거야 상관없지만 그녀가 나를 사랑 하게 대꾸했다. 내가 그녀에게 관심을 갖는 거야 상관없지만 그녀가 나를 사랑하게 되면 곤란하니까. 젊은 나야 앞으로도 여자가 많겠지만 아버지는 그 나이에 어디서 그녀 같은 여자를 또 구하겠는가. 나는 부자간의 윤리로 서가 아니라 휴머니즘이라는 더 큰 테두리 안에서 아버지의 입장을 이해했 다. 저렇게 열심히 그리고는 있지만 그녀는 별로 유명한 화가는 아니었다. 화랑에 나온 그녀의 그림은 대부분 아버지가 사서 가까운 이들에게 선불하 곤 했다. 그래도 나는 그녀를 보고 있으면 유명한 프랑스의 화가를 복 있 다는 착각에 빠지곤 했다. 바게트, 카페오레, 코냑, 아틀리에, 카트린... 을 발음하는 그녀의 입모양은 정말 프랑스 사람 같았으니까. 붓을 들고 있 는 것만으로도 그녀는 누구보다 뛰어나게 화가 같은 분위기를 만들어내니 까. "그렇게 담배만 피고 있지 말고 그럼 독서실이라도 가든가. 사수를 계획 하고 있는 게 아니라면." 누가 장미의 가시를 조심하라고 했는가. 냉정한 그녀. 오늘도 어김없이 재수에 재수를 거듭하고 있는 나를 죄수처럼 몰아ㅂ이는군. 나는 담배를 비벼 내 엉덩이를 힘껏 떼었다. 서연이와의 약속에 늦지 않으려면 어차피 서둘러야 했다. 장마가 시작되려는지 맥도날드의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하늘은 못생긴 산모처럼 보기싫을 정도로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천원으로 뭘 먹지? 맥도날드의 텔레비전 광고를 맥도날드에 앉아 떠올리는 건 자연스러웠 다. 광고에 등장하는 갈비, 설렁탕 등의 천 원 어치는 먹다 버린 쓰레기처 럼 형편없었다. 그 쓰레기 같은 천 원 어치 뒤로 맥도날드 햄버거는 탐스 럽게 떠올랐다. 백 원이 남기까지 한다며. 엄마가 지금 그 광고를 본다면 뭐라고 할까? 생각을 바꾸고 나처럼 햄버거를 먹었을까? 그랬다면 지금 저 창의 하늘처럼 흉한 모습을 매게 마지막 모습으로 남겨놓지도 않았을 것이 다. 못생긴 산모는 애라도 낳지. 엄마는 아이를 가진 것도 아니면서 배만 물렀다. 뱃속에 몹쓸 것들만 잔뜩 채워넣어 결국엔 먹어도 먹어도 굶어죽 을 수밖에 없었던 엄마. 나는 흐린 하늘에 눈길을 던지며 또 이어폰을 꽂 았다. ... 난 또 사막을 걸어가고 있지. 무덥지만 난 쓰러지지 않아... 엄마는 오래도록 방직공장에서 일한 탓에 청력이 약했다. 그래서 목소리 가 큰 편이었다. 아버지는 무식한 사람이 목소리가 큰 거라며 엄마에게 핀 잔을 주곤 했다. 엄마가 방직공장에서 일을 시작한 건 아버지의 뒷바라지 를 하기 위해서였다. 아버지는 <법조계의 별>이 되고 싶어했지만 엄마의 청력을 다 잡아먹도록 한 번도 고시에 패스하지 못했었다. 아버지는 사업 가가 되기로 꿈을 바꿨다.청력이 약해진 대신 목소리가 커진 엄마는 시장 에서 좌판을 벌이기 시작했다. 과일, 야채, 생선... 엄마는 닥치는 대로 팔았다. 아버지 역시 닥치는 대로 사업을 벌였지만 벌이는 족족 다 망했 다. 그래도 나는 사업이 망한 집 아이 같지 않게 입성이 말끔했다. 너에겐 엄마도 있고 아빠도 있다. 기죽지 말고 살아야 해. 내가 아이들 사이에서 혹시라도 기가 죽을까봐 엄마는 부지런히 나를 씻기고 입혔다. 아버지는 역시 사업가는 말끔해야 한다는 엄마의 지론에 따라 영화배우처럼 멋진 옷 만 입고 다녔다. 아버지와 나는 점점 세련되어졌다. 그러나 엄마는 점점 초라해졌다. 좌판에 앉은 여자는 좌판에 앉아 있는 여자차럼 보여야 한다 는 것도 엄마의 지론이었기 때문이었다. 항상 적절하게 변신했던 엄마는 끝내 사모님으로 변신하는 데는 실패했다. 그것은 몸뻬바지를 입고 전대를 두른 엄마의 모습과도 같은 우리 집 밥상에서부터 미리 예고된 일이었는지 도 모른다. 왕자의 옷을 입고 거지의 밥을 먹으며 어쨌든 나는 무럭무럭 자랐다. 그러다가 기회가 왔다. 아버지의 정력 보강음료가 크게 히트를 쳤 던 것이다. 엄마는 더 이상 좌판을 벌이지 않아도 되었다. 엄마는 그동안 못 해먹인 게 한이 되었는지 부지런히 음식을 해대기 시작했다.그러나 아 무도 먹어주지 않았다. 아버지는 늘 사업 때문에 밖에서 별 희한한 음식을 먹고 들어왔고, 나는 친구들과 함께 하디스, 웬디스, KFC, 코코스 등으로 돌아다니기 바빴다. 아버지와 나는 엄마가 집에서 만들어주는 음식이 눈에 차지 않았다. 특별히 맛이 없는 것도 아니었고, 내가 외국 음식에만 맛이 들어서도 아니었다. 나는 밖에서 돌솥비빔밥이나 떡만두국 같은 것도 곧잘 먹었으니까 말한 음식을 보고 있으면 삶의 수준이 한 단계 떨어지는 것 같 았다. 중학교 졸업식 때 점심을 먹으러 중국집에 갔을 때 엄마는 이름도 모르는 중국집아라기에... 얘는 자장면을 좋아하는데... 엄마는 그 두마디 만, 그것도 끝을 맺지 못하고 바보처럼 중얼거릴 뿐 제대로 음식을 먹지도 않고 아버지와 나를 슬픈 눈으로 쳐다봤다. 아버지는 몰라도 나는 그 눈빛 을 분명히 보았다. 잠자코 먹기만 하면 좋을 것을 그런 눈빛을 하고 있는 엄만가 짜증스러워서 나는 못 본 척하고 음식을 먹기만 했었다. 그날 이후 엄마는 우리 부자의 욕망을 눈치챘는지 요리책을 보고 장식이 화려한 요리 로 종목을 바꾸었다. 삼치 한 마리를 구워도 전과는 달랐다. x자로 칼집도 넣고 무채를 담은 접시에 구운 삼치를 올려놓고 파슬리로 장식까지 했다. 아무리 요리책에 나온 것과 똑같이 요리를 만들어내도 엄마가 하면 맞지 않은 옷을 입은 것처럼 어색했다. 그리고 아무도 먹지 않는 음식들은 그대 로 쌓이기 시작했다. ...난 요구한 모든 것을 갖고 있어. 난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원하지는 않아. 난 이것을 엄마한테 배웠지... "사람이 왔는데도 그렇게 음악만 듣고 있을 거야?" 시네드 오코너의 섹시한 목소리가 갑자기 끊어져서 고개를 들어보니 서 연이가 내 이어폰을 빙글빙글 돌리며 서 있었다. 까만 나시 티에 블루진 핫팬츠를 입은 서연이는 그녀만큼이나 섹시하고 귀여웠다. 나는 아무래도 아버지를 닮은 모양이다. 세련되고, 섹시하고, 예쁘고, 귀여운 여자만 좋 아하는 걸 보니. "빨리 나가자. 내가 INVU에서 봐둔 미니스커트가 있거든. 그게 네가 줘 야 할 내 생일 선물이야." "햄버거는 무슨... 우리가 어린애니? 난 이제 스무 살이란 말야. 옷 사 고 근사하게 저녁도 먹고 술도 마시고... 그리고 춤도 추러 가자, 빠알 리." 서연이의 애교에 사지가 다 녹을 것 같아서 나는 못 이기는 척하고 맥도 날드를 빠져 나왔다. 하늘은 여전히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비를 쏟든지 애를 낳든지, 저놈 의 하늘을 정말 못 봐주겠는걸. 나는 오늘 날씨가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 다. 그러나 서연이는 날씨야 어떻든 생일이라고 그저 즐거운 모양이었다. INVU에서 봐둔 미니스커트가 있다더니 거기까지 가는 도중에는 이것 저것 마음에 드는 게 많다고 다 입어보며 수선을 떨었다. 수선을 떠는 모습도 초코볼처럼 앙증맞았다. 나는 그 초코볼을 오도독 깨물어 먹고 싶은 심정 을 참느라 잔뜩 흐린 하늘보다도 먼저 땀을 쏟고 있었다. 비처럼, 혹은 애 를 낳는 산모처럼. 서연이는 톡톡 튀고 싶어서 안달이 날 만도 한 애였다. 요정의 얼굴, 요 부의 몸매를 가진 비슷비슷한 애들이 같은 상표를 입고 먹고 마시고 있는 거리. 서연이는 그 애들과 같으면 같았지 결코 못하지 않은 여자애다. 그 애들과 똑같다고 하면 서연이는 자존심에 상처를 받을 것이다. 서연이도 그걸 안다. 그러니까 튀어보는 것이다. 똑같은 모양의 초코볼에 물감을 입 히듯 맑은 날은 레드로, 흐린 날은 블랙으로, 또 어느 어둔 밤엔 야광색으 로, 그리고 오늘이 무슨 날인가. 바로 서연이의 생일이 아닌가. 늘 똑같은 날들에 각각 다른 색깔을 입히려면 이벤트를 기획해야 한다. 크리스마스, 발렌타인 데이, 화이트 데이, 블랙 데이, 옐로 데이... 기획을 짜야 할 날 들이 많지만 특히 생일 파티만큼 확실한 이벤트는 없다. 생일 없이 태어난 사람은 없으니까. 비슷하게 쇼핑하고 비슷하게 식사하고 술 마시고 춤추게 되더라도 이벤트라 이름붙이면 그것은 특별한 일인 것이다. 당연히 서연이 는 오늘 이 거리의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 나는 서연이가 마음껏 튀도록 성심 성의 껏 도울 것이다. 나 자신에게 맹세했다. 서연이의 날씬한 몸매 는 무엇을 압어도 다 잘 소화해냈다. 아무리 봐도 우리 집의 그녀를 닮은 것 같았다. 세수를 안 해도, 머리를 안 빗어도 예쁜 그녀. 우아한 옷차림 을 하면 더더욱 우아해지는 그녀. 무슨 옷을 입어도 시장에서 입던 몸빼 분위기가 나던 엄마와는 너무도 다른 그녀. 중학교 졸업식이 끝나고부터 아무도 먹어주지 않는 음식들을 엄마는 혼 자서 깨끗이 다 먹어치웠다. 나중에는 안 먹어서 남은 음식을 먹는 게 아 니라 엄마는 자기 자신을 위해, 아니 자기 자신을 죽이기 위해 음식을 만 들어 먹기 시작했다. 삶은 감자, 삶은 옥수수, 삶은 달걀, 빈대떡, 찐빵, 오징어 튀김, 잡채, 메밀묵... 엄마는 자신이 생각해낼 수 있는 간식들을 끊임없이 만들었고 또 끊임없이 먹었다. 엄마가 피자나 레모네이드같이 내 입맛에 맞는 간식을 해주었더라면 내가 먹었을까? 솔직히 모르겠다. 나는 그때 친구들과 밖에서 어울려 먹는 것을 더 좋아했다. 그리고 간신히 이해 할 수 있을 것 같았을 때 엄마가 처음엔 싫었다. 그리고 간신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을 때 엄마는 이미 이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간식만 해먹는 것이 아니라 어머니는 아버지나 내가 없어도 하루 세 끼니를 꼭 챙겨 먹었 다. 배추김치, 깍두기, 나박김치, 파김치, 총각김치... 김치란 김치는 있 는 대로 담가놨다가 끼니 때마다 한 가득 늘오놓고 밥을 몇그릇씩 비워냈 다. 엄마는 불과 2주일 만에 9킬로그램이나 몸무게가 불었다. 특히 허리부 터 아랫배까지 오뚝이처럼 불룩해져서 집에 있느 옷은 맞는 게 하나도 없 었다. 몸빼말고는. 엄마는 내 고등학교 입학식에 참석하기 위해 옷을 사야 만 했다. 유일하게 맞는 몸빼를 입고 엄마는 옷을 사러 나갔다. 맞는 게 있을지 모르겠네. 아무리 마담 사이즈래도 아줌마한테는 안 맞을걸요. 안 팔아요, 당장 나가요. 옷가게 점원들은 엄마의 옷차림과 몸매를 보고 지극 히 상식적인 소리들을 질러댔다. 아니다. 나는 따라가지 않았기 때문에 잘 모른다. 하지만 엄마가 옷을 사는 광경이 환히 보이는 것 같았다. "어때?" 서연이가 봐뒀다는 미니스커트는 스판 소재여서 엉덩이의 굴곡이 거의 그대로 드러났다. "섹시해." 솔직한 내 대답이 만족스러운지 서연이의 입이 튤립처럼 야하게 함빡 벌 어졌다. 역시 솔직한 건 좋은 거다. 나는 서연이의 함박웃으에 답하는 의 미에서 캘빈 클라인에 가서 야구 보자도 하나 사주었다. 야구 모자를 씌여 주며, 네가 야구 모자 쓴 게 우리 엄마보다도 더 귀엽다고 하자, 서연이는 기어지 내 볼에 뽀뽀까지 했다. 날씨는 엉망진창이었지만 서연이 때문에 그나마 기분이 좋아지는 것 같았다. 서연이와 내가 저녁을 먹으러 T.G.I. 프라이데이즈에 갔을 때는 4시였 다. 저녁식사를 하기엔 이른 시간이었는데도 사람이 너무 많아서 거의 한 시간이나 기다린 후에 들어갈 수 있었다. 나는 서연이를 기다리게 해서 몹 시 마음이 언짢았다. 그리고 더 언짢은 일이 있었다. 런던브로이, 화지타, 치킨 샐러드 등을 주문하고 나서 서연이를 위해 노래를 부르고 샴페인을 터뜨리고 사진도 찍어줄 직원들을 찾았으나 그들은 이미 다른 테이블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앞으로도 세 테이블을 더 돌아야 우리 차례라는 것 이었다. 또 한번 강조하지만, 오늘은 서연이의 생일이다. 나는 그들이 다 른 테이블에서 하던 것과 똑같이 서연이의 생일을 축하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그들은 서연이만을 축하해줘야 했다. 나는 자꾸 목울대를 넘어 오려는 무엇인가를 삼키느라고 반주로 시킨 밀러 라이트를 급하게 들이켰 다. 서연이의 흥이 깨지지 않도록 최대한 자제하며. 프라이데이즈의 유리벽 너머로 비구름이 점점 두꺼워지고 있었다. 답답 한 날시였다. 빨리 비가 쏟아지든가 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나는 자살이라 도 해버릴 것 같았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약속한대로 술을 마시러 칵테일 바에 갔다. 서연이는 자기처럼 섹시한 이름을 가진 키스오브파이어를, 나는 블랙러시 안을 마셨다. 넘치는 흥을 주체하지 못하며 급하게 칵테일을 마셔대더니 1 시간도 안 돼서 서연이는 탁자에 고개를 떨어뜨렸다. "일어나. 춤추러 가야지." "응, 응, 그래, 그래... " 서연이는 고개도 들지 못하고 응응거리기만 했다. 나는 난감해져서 혼자 서 칵테일을 두 잔 더 마시고 다시 한번 서연이를 깨웠다. 날 두고 가지 마, 난 오늘 집에 들어가지 않아도 돼. 난 스무 살이야. 중간중간 발음이 흐려지는 바람에 정확히는 알 수 없었지만 서연이가 한 말을 정리하면 그랬다. 이건 오늘 내가 작성한 프로그램에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오늘 하루 서연이의 원대로 소모되기로 작정을 한 것도 사실이었 다. 정말 이벤트군. 나는 담배를 한 개비 피운 후 서연이의 겨드랑이에 팔 을 껴서 일으켜 세운 다음, 칵테일 바을 나왔다. 몸빼를 입고 나갔던 엄마가 사들고 온 옷은 놀랍게도 동그라미만 여섯 개가 그려진 가격표를 달고 있었다. 엄마는 백치처럼 웃으며 옷을 입고 거 울 앞에 한참을 서 있었다. 동그라미만 여섯 개가 있는 가격표를 단 옷 같 지 않게 엄마의 몸에 걸쳐진 그 옷은 몸빼바지와 별차이가 없어 보였다. 현란한 꽃무늬도 그렇고, 펑퍼짐한 옷 모양새도 그렇고, 저녁에 집에 들어 온 아버지는 돼지 발에 웬 진주 목걸이냐고, 성경의 말씀까지 인용해가며 어머니를 나무랐다. 어울리지 않는 것도 모르고 꼴에 비싼 걸 걸치고는 싶 었나보지. 엄마는 방직공장에 다니며 청력이 약해진 걸 최대한 이용해 아 버지가 뭐라 하진 못 들은 체했다. 한마디 대꾸도 안 하고 거실로 나와 텔 레비전을 드라마를 보며 껍질도 안 깐 다감을, 씨도 뱉지 않고 그냥 먹었 다. 단감을 열 개 정도 먹고 나서는 꽈배기 도넛을 먹으며 엄마는 애국가 흘러나올 때까지 텔레비전을 보았다. 다음날에도 엄마는 새로 산 옷을 입 고 거울 앞에서 이리저리 모양새를 살펴보았다. 입학식은 내일이에요. 나 는 엄마가 입학식 날을 착각하고 옷을 입었는 줄 알고 엄마의 착각을 일깨 우기 위해 김각한어조로 말했다. 알아, 엄마는 간단히 내 말을 무시했다. 나쁜 년. 나는 이번에도 엄마가 나에게 나쁜 놈이라고 말하려다가 착각했 는 줄 알고 나쁜 놈이에요. 하고 잡아주려다가 엄마의 표정이 너무 굳어 있어서 그냥 가만히 있었다. 이렇게 잘 맞는데, 뭐가 어째? 나아쁜 년. 엄 마는 새 옷을 입은 채로 식당으로 가서 긱탁 위에 올려진 다 식은 고구마 를 먹어대기 시작했다. 나쁜, 켁, 년, 켁켁, 켁켁켁, 뭐, 켁, 가, 켁켁, 어, 켁켁켁... 식은 고구마를 제대로 씹지 않아 목이 메고 사금이 막히는 지 엄마는 가슴을 두들겨가며 고구마도 낍고, 나쁜 연도 씹었다. 그러나 잘 씹으려는 엄마의 마음과는 상관없이 고구마 덩어리와 나쁜 년이 했다는 말은 엄마의 이 사이레서 홋돌다가 목구멍에서 자꾸만 걸렸다. 결국 그것 들은 목구멍만 막은 것이 아니라 엄마의 숨구멍까지 막고 말았다. 켁켁켁 켁켁켁켁켁... 이것이 엄마의 마지막 말이었다. 그러니까 엄마의 유언이었 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무슨 뜻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게 무슨 말인지 몰라서 나는 엄마를 묻던 날 몹시 울었다. 칙칙하게 내리던 비보다 더 칙칙하게. 왜 이렇게 어려운 수수께끼를 내고 갔냐고, 나 혼자 는 절대 풀 수 없다고. ... 거짓 고향으로 이주시키고 이산가족을 만들다니 이해할 수 없는 노 릇이야... 날 매수할 수 없어. 엄마를 주든 관심이 없으니까. 내게 선 시 티를 청하지 말아요. 난 출연하지 낳을 테니까. 스티브 밴 젠트는 이어폰을 타고 와서 내 귀에다 이렇게 지껄이고 있었 다. 그러나 난 관심이 있었다. 얼마를 주든 그 수수께끼를 풀 수 만 있다 면, 나는 비를 맞고 걸으며 스티브 밴 잰트를 들었다. 모텔에 방을 잡고 들어갔을 땐 일곱시도 안 왜었다. 비록 취중이긴 서연 이는 스스로 옷을 벗었고 나는 내것이 드디어 바게트처럼 부풀어오르는 것 을 보았다. 나를 갖고 싶지? 아니. 왜지? 네가 나를 가져줘. 그러자 서연이는 까를 웃으며 내게로 달려들어 내 바게트의 속살을 카트 린처럼 조금씩, 조금씩 먹기 시작했다. 엄마, 엄마, 엄마. 나는 참을 수가 없었다. 얼마를 주어도 풀수 없는 수수께끼의 무게에 눌려 나는 거의 푹발 할 지경이었다. 엄마. 흑흑흑. 서연이가 바게트의 마지막 속살을 다 뜯어먹은 순간, 나는 속으로만 부 르던 엄마를 기어이 입 밖으로 쏟아내고야 말았다. 서녕이는 놀라서 둥그 래진 눈으로 나는 쳐다보다가, 소태라도 씹은 듯 쓴 얼굴을 하고는 물소리 도 요란하게 샤워를 하고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그래, 너희 엄마는 이쁘고, 귀엽고, 섹시해, 됐니? 서연이는 마지막으로 그런 말을 하고 갔다. 자기 이름을 부르지 않아서 자존심이 상한 모양이었다. 서연이는 나의 이벤트를 이해하지 못했다. 우리 엄마는 귀여워. 아니야, 우리 엄마는 섹시해. 아니야, 그래, 아니 야... 나는 담배를 빨며 말도 안 되는 소리들을 혼자 주워삼켰다. 껍데기 만 남은, 말라비틀어진 바게트가 팍, 부서졌다. 서연이가 나를 가져줄 수 ㄹ다는 걸 나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밖에 나오니까 비가 내리고 있었다. 드디어 장마가 시작되는가보았다. 나는 비가 내리는 음습한 골목에서 스티븐 밴 젠트를 귀에 꽂고 집을 향해 걸었다. 동네 어귀에 들어서자 이상하게 시야가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벌써 사람 들이 모두 잠들었을 리는 없을 테고, 이상한 일이었다. 집 앞에 도착해서 초인종을 누르는데 소리가 나지 않았다. 아하, 정전인 모양이군. 나는 일 순간에 깨달음을 얻은 도사 같은 표정으로 초인종 누르는 것을 멈추었다. 어쩌면 나는 정말 깨달음을 얻은 도사가 됐는지도 몰랐다. 늘 똑같은 날들 중에 하루였지만 오늘은 어쩐지 너무 많은 곳을, 그것도 금지된 곳만 찾아 서 다녀온 이분이었다. 여행의 끝에 깨달음이 있으라. 비를 맞아선지 좀 추운 기분이 드는 것을 지워보려고 담배를 한 대 불며 나는 짐짓 도사처럼 중얼 거렸다. 그러나 담배도 젖었는지 불이 붙지 않았다. 네 신세나 내 신 세나. 나는 불이 붙지 않는 담배를 어둠의 끝을 향해 던졌다. 온기에 대한 희망이 사라지자 갑자기 온몸이 덜덜 떨려왔다. 이렇게 추위에 약하다니. 도사가 되려면 아직 멀었다. "왜 집 앞에서 그러고 있냐? 택시라도 타고 올 것이지 비는 홀딱 맞고 서." 어느 틈에 아버지가 대문 앞에 나와 있었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서 성장 한, 그래서 더 우아해진 그녀가 보라색 우산을 받쳐들고 따라나왔다. 밤외 출이라도 하려는 모양이었다. "어머나, 다 젖었잖아. 어디서 뭘 했길래. 저녁은 먹었어? 안 먹었으면 같이 가. 오늘 아버지가 모처럼 일찍 들어오셔서 모나코에 가서 가재요리 먹을 거거든." 아름다운 데다 친절하기까지 한 그녀. 밥상을 차려주진 못해도 늘 마음 속으로는 내 끼니를 염려하고 있었다니. 그녀의 친절에 어떻게 보답할까. 당장이라도 그녀를 쓰러뜨리고 우람한 바게트를 먹여줄까. 나는 정말 그렇 게라도 그녀의 뱃속으로 들어가고픈 심정이었다. 그녀의 뱃속에서 열 달쯤 들어앉아 있다가 다시 나와서 엄마라고 부르고 싶었다. 아버지가 그녀를 엄마로 만들어줄 수 없다면 나라도 그렇게 해야 한다는 엄청난 의무감이 내 내부에서 꿈틀거렸다. 그녀를 계속 이렇게 여자로 놔뒀다간, 어느 날 아버지는 바로 자신의 아들이 내리찍은 도끼에 온몸을 찢기고야 말 것이 다. "발리 대답해. 갈 거야. 안 갈 거야?" 못 볼 것을 본 듯 아버지는 내 눈을 피하며 한껏 무뚝뚝한 어조로 다그 쳤다. "난 가재 같은 건 먹을 줄 몰라요." 내 대답에 아름답고 친절한 그녀는 실망한 눈빛이었다. 그래야지. 나를 사랑하게 되면 곤란하니까. "내가 뭐라 그랬어. 쟤는 즈이 엄마를 닮아서 입맛이 촌스럽다니까. 그 래도 어려선 안 그러더니 갈수록 똑같아져." 아버지가 자동차에 키를 꽂으며 말했다. "얼마나 촌스러웠길래?" "말도 마." "당신이 너무 못해준 거 아니야?" "무슨 소리야?" "너무 안됐잖아. 그 여자는 뭐 그러고 싶어서 그랬겠어. 근데 당신 어떻 게 같이 살았어? 응?" 그녀는 나의 엄막 얼마나 촌스러웠는가를, 그리고 촌스럽다는 게 도대체 무엇인가를, 백 번 죽었다 깨어나도 모를 것이다. 상상조차 못 할 것이다. 자동차 문을 여는 아버지 뒤에서 우산을 받쳐들고 고 귀여운 입을 쉬지 않 고 쫑알대고 있는 그녀는, 절대, 아무것도... 그녀의 입을 보고 있으려니 나는 갑자기 허기가 지는 느낌이었다. 나는 그녀의 귀여운 입을 그져 바라만 보는 것을 참을 수 없어서 대문 안 쪽으로 급하게 발길을 돌렸다. "정전이야. 그러니까 무리하게 공부하려 하지 말고 그냥 푹 자. 알았 지?" 그러나 그녀는 집 안으로 들어가야만 하는 내 마음을 모르는지 들어가는 내 뒤통수에다 대고 끝내 한번 더 귀엽게 쫑알거렸다. 집 안은 정말 어두웠다. 나는 마치 빙하기의 밤시간대에 와 있는 기분이었다. 모든 생물이 얼어 있고, 모든 빛이 죽어 있는. 바로크풍의 화려한 거실 가구들도 빛이 죽어 있는 곳에서는 그림자 하나 보여주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배가 몹시 고팠 다. 그냥 느낌이 아니라, 정말이었다. 배가 너무 고픈 나머지 산모의 진통 에 버금갈 만큼 격렬한 통증이 위를 자극하기까지 했다. 나는 라이터를 켜 들고 빙하기 얼음 속에 숨어 있는 생물을 찾아 나선 탐사자처럼 식당을 들 어갔다. 식당에 들어서자 어둠에 묻힌 냉장고가 정말 빙하기에 멸종한 공룡처럼 보였다. 너는 드디어 멸종했구나. 나는 괜히 기분이 좋아져서 냉장고 문을 경쾌하게 열어젖혔다. 냉장고에 들어 있는 700리터 분량의 음식을 단숨에 먹어치울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두우니까 쟁장고에 든 음식이 얼마나 아름 답게 가꿔져 있는지는 알 바 아니었다. 그냥 입으로 먹을 수 있으면 그만 이었다. 맨 처음 손에 잡힌 건 크로와상이었다. 먹기 싫었다. 나는 그것 역시 어둠속으로 던져버렸다. 피자, 생크림 케이크, 와인, 햄버거 스테이 크, 브라운 소스, 래몬 즙, 콩소메, 달걀 카나페, 감자 샐러드, 오리 피 클... 다, 다 먹기 싫은 것들뿐이었다. 어느새 냉장고는 텅 비어 있었지만 나는 단 한 가지의 먹을 석도 찾을 수가 없었다. 나는 허기진 배를 움켜잡 고 냉장고를 쳐다보았다. 냉장고의 텅 빈 위장을 보자, 왠지 모르게 냉장 고에게 미안하고 부끄러웠다. 파출부 아줌마가 먹다 두고 간 도시락이라도 찾을 수 있었으면 이렇게 부끄럽진 않았을 것이었다. 나는 냉장고에게 사 죄하는 마음으로 위장보다 더 근사한 무엇인가를 만들어주어야겠다고 생각 했다. 나는 냉장고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냉장고 속은 의외로 따뜻해서 비에 젖은 몸에 금세 온기가 퍼지는 것 같았다. 나는 태아처럼 몸을 구부렸다. 그리고 또 귀에 이어폰을 꽂았다. U2였다. ... 나는 나의 과거를 정복했지. 마침내 미래가 여기 있지. 난 개로운 세상으로 들어가는 입고에 서 있다네. 내 바로 앞에 있는 파멸들은 곧 나 를 놓치게 될 것이야. 사랑은 나를 구조한다네. 해설 : 이남호 [냉장고]는 깜찍하고 귀여운 작품이다. 그것은 소위 신세대 소설의 특성 을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단순한 구성과 감각적이고 경쾌한 문체, 그리고 욕망과 느낌의 유치한 솔직성, 록 뮤직과 새로운 문화들의 나열, 만화 같 은 비현실적 분위기, 상품적 상상력 등등이 잘 어우러져 있다. 그러나 [냉장고]는 여타의 다른 신세대 소설에서는 잘 발견할 수 없는 장점을 또한 지니고 있다. 90년대 이후에 등장한 우리의 신세대 소설들을 보면, 대개는 주제의식이 약하다. 부유하고 어려움 없는 환경에서 철없이 자란 화자 또는 주인공의 뜻 없는 소외감이나 사랑타령 또는 사회적 금기 의 맹목적 부정이 주로 이야기된다. 그러나 그 주제들이 실존적 진실성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며, 따라서 어설픈 넋두리나 투정이라고 생각될 때가 많다. 그러니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새로운 문체나 어법 그리 고 소비문화상품들은 빌려 입은 옷처럼 어색하다. 이에 비해 [냉장고]의 주제의식은 돋보인다. 그것은 우리 사회의 중요한 일면을 재치 있게 포착 하고 또 적절한 상상력으로 문제삼는다. [냉장고]의 화자는 삼수생이다. 그는 벼락부자가 된 아버지와 아주 젊고 세련된 새 엄마와 함께 산다. 그를 낳은 어머니는 가난 속에서 고생만 하 다가 부자가 되어 바뀐 환경에 적응할 수 없어 급체로 돌아가셨다. 그런데 그 비유는 주로 음식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돌아가신 엄마는 과거에 우리 가 먹던 촌스런 음식들을 즐겨한다. 그러나 새엄마는 새로 유행하는 서양 음식들만 먹는다. 그러니까 된장과 김치와 꽁치구이와 고구마 등이 돌아가 신 엄마의 음식이라면, 바게트와 햄버거와 가재요리와 베이컨 등은 새엄마 의 음식이다. 새엄마는 음식을 하지도 않고 또 별로 먹지도 않으면서 대형 냉장고 언제나 신세대 음식들을 가득 진열해 놓는다. 이처럼 음식으로 특 성화되어 있는 두 엄마는 각각 재래적인 생활문화와 새로운 생활문화의 제 유적 의미를 지닌다. 그러니까 작가는 재래적인 생활문화가 경멸되고 새롭 고 낯설고 선정적인 생활문화가 확산되고 있는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을 두 엄마의 성격을 통해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보다 흥미로운 점은, 화자의 태도이다. 화자는 세련된 새엄마에 대히여 양가적 감정을 지나고 있다. 그는 새엄마의 세련된 스타일에 대해 서 물리칠 수 없는 유혹을 느낀다. 그도 그러한 스타일의 삶을 살고 싶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완전히 그런 스타일에 동화될 수 없는 자신을 느낄 뿐 만 아니라, 그 새로운 스타일의 삶에 알 수 없는 적의를 느낀다. 이러한 양가적 감정은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촌스럽고 수더분하고 정감어린 어머니에 대해서도 한편으로는 싫어하고 또 한편으로 는 연민과 진정한 소속감을 느낀다. 화자의 이러한 태도는, 오늘날 급격히 변화하는 생활문화 또는 소비문화의 스타일에 대해서 우리가 일반적으로 갖는 태도와 일치한다. 그리고 결국 새로운 생활문화의 선정적 매력 속에 무언가 부정적 요소가 있음을 적절하게 드러낸다. 그것은 화자가 불 꺼진 집에서 냉장고의 내용물을 다 꺼내버리고 그 속에 들어가는 마지막 장면에 서 의미심장하게 강조된다. [냉장고]는 우리 새대의 문화 충돌을 재치 있게 드러낸 작품이다. 그리 고 문화 충돌이라는 이 주제는 우리 시대의 매우 중요한 화두라고 생각된 다.